사 상 》사상의 개관 / 핵심사상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교육과 정치의 중심사상이 되면서 불교, 도교에 대한 배척이 심하였다. 조선의 개국 초기에 정도전은 '불씨잡변' 등을 통하여 불교와 도교를 강하게 배척하였는데 이러한 전통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특히 퇴계의 불교와 도교 그리고 양명학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영향으로 더욱 심해졌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는 오직 유교(주자학)을 금과옥조로 삼아 여기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가혹하게 처벌하였다. 결국 조선시대의 사상은 대부분이 주자학에 치우쳐 사상의 폭이 넓지 못하고 외형적으로 볼 때 너무나 단조로운 면이 있었다. 그러나 율곡은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유학만을 연구하지 않고 불교, 도교, 양명학 등을 두루 연구하였다. 이러한 율곡의 개방적인 학문태도는 사상의 폭을 넓혀서 퇴계와 쌍벽을 이루어 우리나라의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키게 되었다.

 율곡의 문인 우암 송시열의 글을 보면 율곡은 10세 전후에 불경을 읽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16세 때 신사임당이 돌아가시자 봉은사에서 불경을 읽고 생사관에 깊이 심취하기도 하였으며, 19세에는  금강산에 들어가 그 당시 금기시 했던 불교를 깊이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참선에 드니 조주가 없어지고

한 번의 돈오에 속세를 잊는구나."

 그 당시 사회 풍토에서 매우 용기있는 율곡의 이러한 행동은 그 자신의 인생과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며, 율곡의 독창적인 '이통기국(理通氣局)'의 용어도 불교 화엄의 '이사(理事)'와 '통국(通局)'에서 유래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또한 율곡은 도교에도 관심이 깊었다. 이러한 경향은 금강산에 머무르며 쓴 '도중(途中)'이라는 시에서도 보이며, 노자의 도덕경을 주석한 '순언(醇言)'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순언은 율곡이 도덕경 81장 중에서 유교 경전의 내용과 일치하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뽑아 40장으로 재편성한 것이다. 도덕경의 해석에 있어서 율곡은 물론 유학자들의 학설에 근거하여 성리학적인 입장에서 노자를 파악하고자 하였으며, 노자의 근본적 입장은 유교와 마찬가지의 가치를 지닌다고 보고, 이런 점들을 과감하게 수용하려고 하였다.

 율곡은 불교, 도교 뿐만 아니라 양명학도 포용한다. 양명학은 명나라의 왕양명(본명은 왕수인)에 의해 주창된 유학의 한 계통으로 송의 육구연과 명의 진헌장의 심학을 계승하여 주자의 주지주의적인 이학과 대립하는 심학을 완성하고 치양지설과 지행합일설을 주장한 것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대체로 양명학을 배척하는데, 특히 퇴계는 양명학마저 이단으로 강력히 배척하였다. 하지만 율곡은 양명학의 선학적(禪學的) 경향과 그 폐단에 대하여는 비평하였으나, 양명학 자체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비판, 배척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특히 율곡은 왕양명의 본심과 주자의 예절을 조화시키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