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애 》생애의 개관 / 일대기 / 업적,배울점 / 연보
 

1. 가계와 출생

 율곡 이이는 1536년(중종 31년) 강릉부 북평촌(지금의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원수(李元秀)공과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 1504~1551)은 7남매를 두었는데 율곡은 4남 3녀 중 셋째 아들이다. 이름은 이(珥),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이다. 호인 율곡은 고향인 경기도 파주 율곡촌에서 따온 것이고, 처음 이름은 현룡(現龍)이었는데 11세 때 이(珥)로 바꾸었다.

 율곡을 낳던 날 저녁에 신사임당의 꿈에 검은 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와 마루 사이에 서려 있는 꿈을 꾸어서 어릴 때 이름을 현룡이라 하였으며,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고 한다.

2. 유·소년기

 율곡은 출생하여 오죽헌에서 자라다가 6세 때에 서울로 올라와 10년간 살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신동으로 일컬어졌으며, 13세에 진사 초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는데, 이후 9번이나 과거에 급제하여 9도장원공((九度壯元公 : 아홉 번 장원한 사람)이라 불리게 되었다. 16세 되던 해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고, 수운판관으로 임명되어 평안도로 출장가는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가 신사임당이 1551년(명종 6년) 48세의 나이로 갑자기 돌아가시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어머니를 경기도 파주시 동문리 자운산에 장사지내고 3년상을 지냈다. 모든 절차를 가례에 따라하여 상복과 삼띠를 벗거나 풀지 않았으며, 음식을 올리고 그릇을 씻는 등 모든 일을 노비들에게 시키지 않고 손수하였다고 한다.어머니의 죽음과 서모 권씨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던 율곡은 18세에 봉은사를 찾아 불경을 읽기도 하였다.

3. 청년기

 19세 때 평생의 동지가 된 우계 성혼(牛溪 成渾 : 1535~1598)을 만나게 되고, 3년상을 마친 그 해 3월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교 공부를 하게 된다. 그 당시 중은 가장 천대를 받던 때이므로 이러한 행동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 것이었다. 불교에 만족하지 못하고 노장사상도 함께 탐구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점은 유교만 공부하던 그 당시 보통 선비들과는 다른 점이었다. 그러다가 논어를 다시 읽다가 깨달은 바가 있어 산을 내려왔다. 금강산에 들어간 지 1년 후의 일이었다. 이 때 율곡은 자신을 스스로 경계하는 지표로 삼는 자경문을 지었다.

 21세에 한성시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하고,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였다. 23세 때 성주 처가에서 강릉 외가로 가는 도중에 예안의 퇴계 이황(退溪 李滉 : 1501~1570)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퇴계는 그 때 58세의 원숙한 대학자였다. 이 때의 인연으로 두 사람은 시를 주고 받고, 학문에 대하여도 서로 강론하게 되었으며 후에 편지도 주고 받았으며 율곡은 퇴계를 스승처럼 존경하게 되었다. 퇴계는 율곡을 만난 후 여러 사람에게 후생가외(後生可畏 : 후배들이 두려운 것이라는 뜻)라고 칭찬하였다.

 23세 겨울에 별시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급제하여 당시 고시관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26세 때인 1561년(명종 16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자운산에 모신 신사임당의 묘에 합장한 후 3년상을 치렀다.

4. 장년기

 율곡이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펼치고 동서 붕당의 조정을 위해 노력한 시기이다. 29세에 문과와 명경과에 장원급제하여 호조좌랑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40세 까지 예조좌랑, 이조좌랑,홍문관 교리, 청주목사, 우부승지, 황해도 관찰사, 홍문관 부제학 등을 지냈다. 이 시기에 건의한 개혁정책과 주요 저술은 시무삼사, 간원진시사소, 동호문답, 시무구사, 만언봉사, 성학집요 등이 있다. 또한 이 시기에 명종이 승하하고 퇴계 선생이 돌아가셨다.

5. 말년기

 41세에 이후 여러 차례 벼슬의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였는데 은퇴을 결심하고 해주(海州) 석담(石潭)으로 돌아가 청계당을 짓고, 43세에 은병정사를 지어 교육에 힘쓰던 시기이다.이 때 가족헌장과 같은 동거계사(同居戒辭)를 지어 실천했으며, 격몽요결(擊蒙要訣)과 고산구곡가, 소학집주, 경연일기, 인심도심설, 학교모범, 6조방략(六條方略) 등을 지은 시기이다. 이 시기에 대사헌, 호조판서, 이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48세에 유명한 10만양병설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죽음을 이틀 앞 둔 위중한 때에 좌우의 부축을 받아가며 일어나 국방의 임무를 띠고 전선으로 가게 된 서익(徐益)에게 6조방략을 가르쳐 주었다. 49세 정월 16일에 서울 대사동(종로 화신백화점 일대)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계 성혼이 곡하고, 송강 정철이 곡했다. 율곡은 집안에 모아 놓은 재산이 없어 다른 이의 수의를 얻어다 염습을 했다. 선조 역시 애통해하며 3일간 조회(朝會 : 모든 관리가 정전(正殿)에 모여 임금에게 문안을 드리고 정사(政事)를 아뢰는 일)를 보지 않았다.

 1642년(인조 2년) 시호를 문성(文成)이라 내리고, 1682년(숙종 8년)에 문묘에 배향하였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1615년 (광해군 7년)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이 고향인 율곡을 제사지내기 위하여 자운서원(紫雲書院)을 세웠다. 해주의 서현서원(은병정사 : 隱屛精舍),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등 20여개 서원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