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료 실 》관련용어
 

1. 거경궁리

2. 격물치지

3. 경

4. 구용

5. 극기복례

6. 기호학파

7. 노장사상

8. 논어

9. 4단7정

10. 사화

11. 성리학

12. 성즉리

13. 송학(도학)

14. 실사구시

15. 심성론

16. 심즉리

17. 양명학

18. 영남학파

19. 오륜행실도

20. 을사사화

21. 음양오행설

22. 이기론

23. 이기이원론

24. 이기일원론

25. 이통기국설

26. 인성론

27. 주자가례

28. 지행합일

29. 퇴계학

 

1. 거경궁리 (居敬窮理)

 주자학(朱子學)에서 주창하는 학문수양의 기본방법. 거경과 궁리의 두 강목(綱目)을 말한다. '근사록(近思錄)'에 '수양(修養)은 모름지기 경(敬)으로써 하여야 하고 진학(進學)은 치지(致知)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거경의 경(敬)이란, 주일무적(主一無適)으로서 마음을 한 군데에 집중하여 잡념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면적인 집중만이 아니고 외면적으로도 엄숙한 태도라야 한다. 정호(程顥)도  '경(敬)으로써 안을 바로 잡고 의(義)로써 밖을 바르게 한다'라고 '근사록' 권4에서 강조하였다. 주희(朱熹)는 2정자(二程子 : 程顥와 程의 형제)를 계승하여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정좌(靜座)를 권하였다. 궁리란, 이른바 격물치지(格物致知)이며, 그 방법으로서는 박학(博學)·심문(審問)·신사(愼思)·명변(明辨)·독행(篤行)을 들었다. 거경과 궁리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또 사람의 두 발과 같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인(仁)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2. 격물치지 (格物致知)

 중국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8조목으로 된 내용 중, 처음 두 조목을 가리키는데, 이 말은 본래의 뜻이 밝혀지지 않아 후세에 그 해석을 놓고 여러 학파(學派)가 생겨났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주자학파(朱子學派 : 程伊川·朱熹)와 양명학파(陽明學派 : 陸象山·王陽明)이다. 주자는 격(格)을 이른다(至)는 뜻으로 해석하여 모든 사물의 이치(理致)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앎에 이른다(致知)고 하는, 이른바 성즉리설(性卽理說)을 확립하였고, 왕양명은 사람의 참다운 양지(良知)를 얻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물욕(物欲)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하여, 격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풀이한 심즉리설(心卽理說)을 확립하였다. 즉 주자의 격물치지가 지식 위주인 것에 반해 왕양명은 도덕적 실천을 중시하고 있어 오늘날 주자학을 이학(理學)이라 하고, 양명학을 심학(心學)이라고도 한다.

3. 경(敬)

'경건함','공경하다' 등의 뜻. 고대의 '일을 경건하게 처리하다(敬事)','귀신을 공경하다(敬鬼神)','형을 공경하다(敬兄)' 등의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동사로 많이 쓰였으나 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논어(論語)'에서 공자가 '경건함을 가지고 자기를 닦는다(修己以敬).'고 하고, '주역(周易)' '문언전(文言傳)'에서 '겅건함을 가지고 마음 속을 곧게 만든다(敬以直內).'고 하여 수양의 수단으로 사용한 데서 비롯된다. 이때의 경의 의미는 '생각이나 헤아림을 중단한 상태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간직하는 것'이 된다. 경(敬)이 수양의 수단으로 사용되게 된 철학적 배경에는 성선사상(性善思想)이 전제된다. 이것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은 본래 착한 것이므로 마음이 처음 밖으로 나타날 때에는 남을 사랑하고 돕는 방향으로 나타나지만, 이때 생각이나 헤아림이 이기적으로 작용하면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해치는 악한 마음으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이나 헤아림 자체를 중지시키면 악한 마음으로 변질되지 않기 때문에 착한 마음을 계속 보존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중국 송나라 때 성리학(性理學)이 발생하여 유학이 철학적으로 심화되었는데 이때 경이 다시 수양의 요체로서 부각되었다. 본연의 착한 마음을 회복하여 성인(聖人)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체계인 성리학에서는 착한 마음을 회복하는 2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다. 하나는 경을 간직함으로써 악한 마음으로 변질되는 요인을 제거한다는 거경(居敬)의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고 그것으로 미루어 간접적으로 자신의 본질인 착한 마음을 인식한다고 하는 궁리(窮理)의 방법이다. 정이(程 : 1033~1107)는 경의 내용에 '마음을 한 가지에만 집중시켜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主一無適)'을 포함시켰다. 한국 성리학에서는 하늘과 사람이 하나라고 생각하는 고유한 사상에 힘입어 궁리보다 거경에 치중하는 경중심의 수양철학이 발달하는데, 퇴계(退溪) 이황(李滉 : 1501~1570)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4. 구용 (九容)

 군자(君子)가 그 몸가짐을 단정히 함에 있어 취해야 할 9가지 자세.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에 나오는 말이다. 즉, ① 경거(輕擧)하지 않는다(足容重), ② 단정하여 망동(妄動)하지 않는다(手容恭), ③ 정면을 바로 보고 곁눈질을 하지 않는다(目容端), ④ 필요하지 않을 때는 입을 다문다(口容止), ⑤ 목소리를 가다듬고 기침, 재채기 등 잡소리를 내지 않는다(聲容靜), ⑥ 고개를 똑바로 하여 한편으로 기울지 않도록 한다(頭容直), ⑦ 호흡을 조절하여 엄숙한 태도를 견지한다(氣容肅), ⑧ 중립불의(中立不倚)하여 점잖은 태도를 갖는다(立容德), ⑨ 안색을 정제하고 태만한 기색을 나타내지 않는다(色容莊) 등의 자세이다.

5. 극기복례(克己復禮)

仁의 체현을 위해 공자가 제시한 구체적 실천 방법. '논어''顔淵'篇에서 안연이 인을 물었을 때, 공자가 "자기를 이겨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을 구하는 방법이다.(克己復禮爲仁)."라고 대답한데서 비롯된 말이다. '극(克)'이란 '극복한다'는 뜻이고, '기(己)'는 생물학적 자아를 뜻하며, '예(禮)'는 천리(天理)에 의해 규정된 인간 행동의 고유한 질서를 의미한다. 인간은 형기(形氣)와 감관(感官)을 가지고 있고 감관은 각각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누구나 그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극기복례는 이러한 생물학적 자아를 극복하여 자기의 생활을 예에 부합시키려는 것이며, 이러한 노력에 의해 인간은 생물학적 자아의 욕구를 통제하고 도덕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극기복례의 구체적 방법은 시청언동(視聽言動)을 예에 의해 훈련시키는 것이다. 곧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는 것이다. 이러한 극기복례의 본질적 의미는 인간의 합리적 행동 질서와 인간의 자연적이고 무절제한 욕망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고 욕망의 절제를 통해 합리적 행동 질서를 확보하려는 측면에서 공자에 의해 제시된 하나의 수양법이라 하겠다.

6. 기호학파(畿湖學派)

조선 중기 기호지방을 근거지로 한 이이(李珥), 성혼(成渾) 학파를 통칭한 말. 원래 기호지방은 경기도와 호서지방, 해서지방을 포괄하는 지역을 의미하지만, 역사적 개념에서 기호학파는 경기도, 충청도 지역의 이이, 성혼의 문인과 학자들의 집단을 지칭한다.

조선 전기에 영남지방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왕조교체에 불만을 품고 은거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단의 학자군이 형성되고, 조선 중기에 이황(李滉)이 배출되면서 영남학파가 성립되었지만 기호학파는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학문적 결속력이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조 후기에 동서분당이 형성되고 영남학파의 다수가 동인이 되면서 이에 대항하는 서인세력이 기호지역을 중심으로 결집하게 되었다.

당색(黨色)으로 볼 때 기호학파는 서인의 주축을 형성했지만, 서경덕(徐敬德)처럼 기호지방(개성)을 근거지로 하면서도 북인(北人)으로 나간 인물들이 있음을 고려할 때, 기호학파가 정치적으로 곧 서인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기호학파를 성립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는 이이, 성혼, 송익필(宋翼弼)을 들 수 있으며,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기호학파의 세력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이이의 문인인 김장생(金長生)을 거쳐 송시열(宋時烈)에 이르러서는 연산(連山), 회덕 (懷德) 등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기호학파는 정계, 학계의 주도권을 차지하였다. 기호학파가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한 데는 무엇보다도 서울에 지역적으로 근접해 있다는 이점이 많이 작용하였다. 숙종대에 이르면 기호학파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회덕을 중심으로 한 송시열 계열은 노론이 되고, 이산(泥山)을 중심으로 한 윤증(尹拯) 계열은 소론으로 분립되었다. 기호학파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등의 성리설과 예학 등에서 많은 학문적 성과를 남겼는데, 특히 송익필, 김장생, 송시열 등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예학은 현종대에 남인과 맞서 극렬한 예송논쟁(禮訟論爭)을 일으키게 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7. 노장사상(老莊思想)

도가(道家)의 중심인물인 노자(老子 : BC 580? ∼ 480?)와 장자(莊子 : BC 370? ∼ 280?)의 사상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좁은 뜻의 도가철학을 뜻하는 말. 그러나 그들의 사상이 도가사상을 실질적으로 대표하므로 노장사상을 일반적으로 도가사상과 같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 당시 노자와 장자는 몰락한 주(周)나라의 문물제도가 지닌 허위성과 형식성을 문제 삼는 반문명적(反文明的) 사상을 키우면서 나타났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상은 공자와 맹자의 가치철학(價値哲學)과 상반적일 수밖에 없었고 부정(否定)과 역설(逆說)의 논리를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즉 그들은 유가(儒家)와는 달리 반형식(反形式), 탈가치의식(脫價値意識)을 가지고 일체의 인위조작(人爲造作), 예를 들면 대사회적(對社會的)인 가치체계나 제도 및 형식에 그치지 않고 그 근원으로서의 내적(內的) 도덕성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비판을 통하여, 어떻게 궁극적으로 자유자재하는 자아해탈(自我解脫)의 상태와 자연무위(自然無爲)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한편으로는 가치(價値)에 물들지 않은 사물(事物)의 세계와 그 사물의 근원에 대한 탐구로서의 존재론적 본체론(本體論)과, 다른 한편으로는 인문세계를 구축하는 가치욕구(價値欲求)를 배제하고 생(生) 자체를 본체의 세계로 개방시키려는 실천적 노력으로서의 무욕양생(無欲養生)의 인생론이라는 고유문제를 다루었다고 할 수 있다.

존재론의 경우, 그들은 도(道)와 덕(德)을 본체와 만물의 기본원리로 삼았는데, 도는 보편원리를, 덕은 특수원리를 의미한다. 그런데 노자가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유생어무(有生於無)'와 같이 도에서 만물이 이루어지는 생래과정(生來過程)에 치중하였다면, 장자는 본체즉현상(本體卽現象)의 입장에서 '일기취산(一氣聚散)'과 같이 만물이 운용되는 운행과정에 관심을 두었다. 사실 중국 사상에서 공통적으로 견해를 같이하는 본체론의 중요 개념들(氣·陰陽)은 노·장에 의하여 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인생론의 경우 인의예지(仁義禮智) 등 사회에서 필요한 질서 형식을 비판함으로써 결국 집단이나 전체중심적 태도로부터 개체중심적 태도로 전환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개체 및 개인의 조화일기(造化一氣)처럼 자유자재하면서도 장구(長久)한 것을 인생의 이상으로 삼고, 그 방법으로서 무욕물화(無欲物化)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노자는 일체의 욕구를 극소화시킴으로써 시비(是非)·피아(彼我)를 구별함 없이 병생(竝生)하는 장생(長生)을 이상상태라 주장하였고, 장자는 신체적 장생에서 한 걸음 나아가 인생을 어떤 경지로 고양(高揚)시키는 양생과 달생(達生)을 주장하였다. 특히 장자는 이런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으로서 무정(無情)과 복성론(複性論)을 제시하였다. 이것이 바로 '수성반덕이복초론(修性反德而複初論)'이며, 장자 내편(內篇)의 소요유(逍遙遊)와 제물론(齊物論), 양생주(養生主) 등은 이러한 수양의 경지와 방법적 차서(次序)를 보여준 것이다. 노자와 장자는 지식문제에서는 회의론(懷疑論)과 상대주의의 입장이어서, 궁극적으로는 반지주의(反知主義)를 통하여 현학적(玄學的) 초월지(超越智)를 이상적인 것으로 제시하였으며, 한편 사회정치론에서는 소국과민(小國寡民) 등 방임주의적 이론을 제시하였다.

8. 논어(論語)

중국 유교(儒敎)의 근본문헌(根本文獻). 유가(儒家)의 성전(聖典)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사서(四書)의 하나로, 중국 최초의 어록(語錄)이기도 하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전하는 가장 확실한 옛 문헌으로, 공자와 제자와의 문답을 주로 하고, 공자의 발언과 행적, 그리고 고제(高弟)의 발언 등 인생의 교훈이 되는 말들이 간결하고도 함축성있게 기재되었다.

【명칭과 편자】 '논어'라는 서명(書名)은 공자의 말을 모아 간추려서 일정한 순서로 편집한 것이라는 뜻인데, 누가 지은 이름인지는 분명치 않다. 편자에 관해서는 숭작참(崇爵讖)의 자하(子夏) 등 64제자설(六四弟子說), 정현(鄭玄)의 중궁(仲弓)·자유(子游)·자하(子夏)설, 정자(程子)의 증자(曾子)·유자(有子)의 제자설, 그 밖에 많은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현존본은 '학이편(學而篇)'에서 '요왈편(堯曰篇)'에 이르는 20편으로 이루어졌으며, 각기 편 중의 말을 따서 그 편명(篇名)을 붙였다. '학이편'은 인간의 종신(終身)의 업(業)인 학문과 덕행을, '요왈편'은 역대 성인의 정치 이상을 주제로 한 것처럼, 각 편마다 주제가 있기는 하나, 용어가 통일되지 않았고 같은 문장의 중복도 있다. 특히 전반(前半) 10편을 상론(上論), 후반을 하론(下論)이라고 하는데, 그 사이에는 문체나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성립】 '맹자(孟子)'나 '순자(荀子)' 등 옛 문헌에는 공자의 말이 '공자왈' '중니왈(仲尼曰)' '전왈(傳曰)'이라고 인용되었으나, 그것이 논어에 기재된 것과 반드시 같은 것도 아니며, 또 논어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제시하는 기술(記述)도 없다. 그러나 한(漢)나라 때에는 제(齊)나라 학자의 '제론(齊論)' 22편, 노(魯)나라 학자의 '노론(魯論)' 20편이 전해졌고, 따로 공자의 옛 집 벽 속에서 '고론(古論)' 21편이 나왔다. 한(漢)의 장우(張禹)는 제·노 양론을 교합(校合)하여 '장후론(張侯論)' 20편을 만들었고 이어 후한(後漢)의 정현(鄭玄:127~200)은 이 세 가지와 고론을 교합하였다. 이 정현본(鄭玄本)을 바탕으로 위(魏)의 하안(何晏)이 '논어집해(論語集解)'라는 주석서(註釋書)를 저술함에 이르러 현존본의 원문이 결정되었다. 근대에 와서 내외의 학자들이 공자의 가르침의 근본을 추구하여, 여러 각도로 논어의 문헌을 비판하고, 논어성립까지의 전승계통(傳承系統)을 탐색하는 한편 한(漢)나라까지의 증보(增補)의 경과를 더듬는 등 많은 가설(假說)을 내세우고 있으나 아직 정설(定說)은 수립되지 않았다.

【내용】 엄밀히 말하면 어느 정도로 공자 본래의 가르침을 전하는가가 문제이지만, 이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논어가 불가결한 문헌임에는 틀림없다. 논어의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수사(修辭)의 묘를 얻어 함축성이 깊고 문장간의 연계가 없는 듯하면서도 깊이 생각해보면 공자의 인격으로 귀일(歸一)되어 있다. 공자의 불요불굴(不撓不屈)의 구도(求道)의 태도, 관용(寬容) 중에서도 사람을 이상선(理想善)인 '인(仁)'으로 이끌고야 마는 교육, 그리고 공자를 중심으로 하여 겸허(謙虛)한 안연(顔淵), 직정(直情)의 자로(子路), 현명(賢明)한 자공(子貢), 그 밖의 제자들의 각기 개성에 따른 상호간의 독려 등,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인도주의(人道主義) 사상과 자각자율(自覺自律)의 도덕설(道德說)을 제시한 공자학단(孔子學團)의 활동이 잘 묘사되었다. 모든 내용이 인생 경험의 깊은 영지(英智)의 결정(結晶)으로 음미할수록 가치가 있는 교훈들이다.

【전래】 유교의 경서는 많지만, 그 중에서 논어는 효경(孝經)과 더불어 한(漢)나라 이후, 지식인의 필수 서책이며, 그 해석의 전거(典據)가 된 것은 '논어집해(論語集解)'(古註라고도 한다)이다. 송(宋)나라 때에는 유교의 공맹사상(孔孟思想)에 의한 집주 통일화(集註統一化)가 이루어졌고, 특히 주희(朱熹 : 1130~1200)가 '사서(四書)'로 추존(推尊)하고, 이를 통일하여 '논어집주(論語集註)'(新註라고도 한다)를 저술한 후에는 이것이 고주에 대체되었다. 중화민국 초기에는 구문화(舊文化) 개조를 위하여 공교(孔敎)·논어 비판이 행하여졌고, 그 후에도 계속되고 있으나, 연구가 지속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한국에도 일찍부터 도래(渡來)되어 한학(漢學)의 성행으로 널리 보급되고 국민의 도덕사상 형성의 기본이 되었다. 구미(歐美) 각국에도 연구서나 번역서가 많으며, 최근에는 미국에 특히 많다.

9. 4단7정론 (四端七情論)

 조선시대의 석학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주장한 인생관의 논리적 학설. 사단(四端)이란 맹자(孟子)가 실천도덕의 근간으로 삼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며, 칠정(七情)이란 '예기(禮記)'와 '중용(中庸)'에 나오는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慾)을 말한다. 이황은, 4단이란 이(理)에서 나오는 마음이고 칠정이란 기(氣)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하였으며, 인간의 마음은 이와 기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선과 악이 섞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인 4단은 이의 발동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성(人性)에 있어 본연의 성(性)과 기질(氣質)의 성(性)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른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이황의 이러한 학설은 그 후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켜 200여 년 간에 걸쳐 유명한 사칠변론(四七辯論)을 일으킨 서막이 되었다. 즉 기대승(奇大升)은 이황에게 질문서를 보내어, 이와 기는 관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서는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내세웠으며, 이를 다시 이이(李珥)가 뒷받침하여 이기이원론적 일원론(理氣二元論的一元論)을 말하여 이황의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이이의 기호학과(畿湖學派)가 대립, 부단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는 마침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사이에 벌어진 당쟁(黨爭)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기에 이르렀다.

 사단(四端)과 칠정(七精)은 마음에서 정(精)의 두 가지 발동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맹자는 사단의 마음을 인간의 성품이 선한 증거로서 제시한 것이며, 칠정은 '예기'에서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인정으로 제시한 것이다.
 처음에 퇴계는 1553년 정지운의 '천명도설'에서 천명도를 수정하면서,"사단은 이의 발동이요, 칠정은 기의 발동이다."(四端理之發, 七精氣之發)라고 고쳤다. 1558년 고봉의 지적을 받은후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여, "사단의 발동은 순수한 이이므로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동은 기를 겸하므로 선도 있고 악도 있다."(四端之發純理, 故無不善, 七精之發兼氣, 故有善有惡)고 제시하면서 고봉에게 의견을 묻는 편지를 보냈던 것이 8년에 걸친 퇴계와 고봉 사이에 벌어진 사칠논쟁의 발단이 되었다.
 퇴계와 고봉이 주고 받았던 사칠논쟁은 학문적 진지성과 자신의 심성론적 논거를 구명하는 분석의 치밀함에서 한국유학사의 학문적 논쟁에 모범이 되고 있다.

10. 사화 (士禍)

 조선시대에 조신(朝臣) 및 선비들이 반대파에게 몰려 화(禍)를 입은 사건. 조선 개국 이래 역대의 임금이 문치(文治)에 힘을 쓰고 유학(儒學)을 장려했기 때문에 우수한 학자가 많이 배출되고, 선비사회, 즉 유림(儒林)은 활기에 차 있었다. 그러나 세조 ∼ 성종 때에 이르러 그들 사이에 주의, 사상, 감정, 정실(情實), 향토(鄕土)관계 등으로 여러 파별(派別)이 생겼는데, 개중에는 기미가 상통하는 파도 있었으나 서로 대립, 반목하는 파도 있었다. 이를 네 파로 대별하면 훈구파(勳舊派), 절의파(節義派), 사림파(士林派), 청담파(淸談派) 등이다. 그 중의 훈구파는 세조의 찬역(簒逆)을 도와 높은 지위와 많은 녹전을 차지한 부귀가 겸전한 일파인데, 정인지(鄭麟趾), 최항(崔恒), 이석정(李石亭), 양성지(梁誠之), 권람(權擥), 신숙주(申叔舟), 강희맹(姜希孟), 서거정(徐巨正), 이극돈(李克墩) 등이다. 절의파는 세조의 찬역행위를 절대반대한 김시습(金時習) 등의 생육신(生六臣)을 중심으로 한 파이다. 사림파는 경상도 밀양(密陽) 출신인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한 일파이다. 사림파의 중심인물인 김종직은 동방성리학(性理學)의 정통을 이어받은 대학자로서 그의 제자 중에는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위(曺偉),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등이 있었다. 이들은 세조의 찬역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점에서는 절의파와 일맥상통하지만 적당한 기회를 얻으면 조정의 요직에 들어가 포부를 펴보려는 점에 있어서는 절의파와 생각을 달리하였다. 그러므로 훈구파에 있어서 정면의 적은 사림파였다. 청담파는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본떠 서울 동대문 밖 죽림에 모여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세월을 보낸 일파로서 남효온(南孝溫), 홍유손(洪裕孫) 등이 대표적이다. 훈구파는 조정의 요직에 있어 세조 ∼ 성종 시대의 여러 가지 관찬사업(官撰事業), 즉 조정에서 간행하는 서적 편찬에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이며, 따라서 한 나라의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들의 녹전은 주로 경기도, 충청도에 있었기 때문에 지역적으로 볼 때, 이들은 기호파(畿湖派)이고,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은 대개 경상도, 즉, 영남(嶺南)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영남파라 하였다. 훈구파와 사림파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대립과 반목이 점점 심각해졌는데, 1498년(연산군 4년) 두 파는 정면충돌을 하였으며, 그 결과 권력을 쥐고 있던 훈구파의 일격에 사림파는 패배하였다.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게재(揭載)한 것에서 발단이 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의하여 김종직은 이미 죽은 후였으므로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욕을 당하고 그 밖의 많은 제자들은 처형되거나 귀양다. 두 번째의 사화는 1504년(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이다. 갑자사화는 투기가 심하여 왕비(王妃)의 자리에서 쫓겨나 사약을 받은 성종의 비(妃) 윤씨(尹氏)의 소생인 연산군이 성종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후 생모(生母)에 관한 사실을 알게 되자, 폐비에 찬성한 신하들과 평소에 연산군의 학정을 불평하던 일부 사림파의 선비들을 한데 묶어,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서 일어났다. 이것은 무오사화처럼, 훈구·사림파 간의 대립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선비가 많이 죽음을 당하였다는 의미에서 사화이다. 세 번째의 기묘사화(己卯士禍)도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대립에서 발생한 사화이다. 훈구파의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훈에 비판적이던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위훈삭제사건(僞勳削除事件)을 일으켜 심정(沈貞),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에게 타격을 가하려다 그들의 반격을 받아 패배한 사건이다. 조광조, 김식(金湜), 기준(奇遵), 한충(韓忠), 김구(金絿), 김정(金淨),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등의 기묘명현(己卯名賢)이 죽거나 유배되었다. 네 번째는 1545년(인종 1)의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이것은 왕실의 외척인 윤임(尹任), 즉 대윤(大尹)과 같은 파평(坡平) 윤씨인 윤원형(尹元衡), 즉 소윤(小尹) 사이의 권력다툼에 말려들어 많은 선비가 타격을 받은 사건이다. 이것도 갑자사화의 경우처럼 선비사회 사이의 싸움은 아니지만 많은 선비가 희생되었기 때문에 사화라고 한다. 4대사화는 1575년(선조 8년)에 이르러 당쟁(黨爭)이 일어나기 전의 선비들에 대한 옥사였다. 그러나 사화는 소수인의 음모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고, 파당을 가진 다수인의 공공연한 논쟁이 따르는 대립과 투쟁에서 패자는 반역자로 몰려 지위를 빼앗기거나 목숨을 잃고, 한 파가 승리하면 이에 대하여 새로운 반대파가 또 생겨 그것이 또다른 사화를 야기시켰다. 이러는 동안 정치의 기강은 더욱 문란해지고, 뜻있는 선비들은 관직을 버리고 당, 서원 등을 세워 유생(儒生)들의 집합 또는 강학(講學)의 장소로 삼는 동시에, 그들 일족의 자녀교육을 하고 이를 통하여 동족적인 당파의 결합을 굳게 하였다. 이와 같이 사화에 의하여 육성된 정치비판과 반대파에 대한 복수관념은, 서원의 발전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당쟁을 격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뜻있는 선비들의 향토 복귀와 교육 실시는 고관대작이 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공리적·세속적인 관학(官學)에 대하여 수양과 사색을 주로 하는 진리탐구의 참다운 학문을 하겠다는 사조와 경향을 낳게 하고, 이로 인하여 사학(私學)의 대연원(大淵源)이 열리게 되었다.

11. 성리학 (性理學)

 중국 송(宋)·명(明)나라 때 학자들에 의하여 성립된 학설. 도학(道學), 이학(理學), 성명학(性命學) 또는 이것을 대성시킨 이의 이름을 따서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한다. 유학(儒學)은 중국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그것이 성립되던 상대(上代)에는 종교나 철학 등으로 분리되지 않은 단순한 도덕사상이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에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있다. 공자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으려고 천하를 주유(周遊)하면서 인(仁)과 예(禮)를 설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고향에 돌아와 육경(六經 : 詩·書·禮·樂·易·春秋)을 제자에게 가르치며 도리(道理)를 후세에 전하였다. 선진시대(先秦時代)에 이르러 유학은 도덕 실천의 학으로서 크게 일어났으나, 시황제(始皇帝)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큰 시련을 겪은 다음 한·당대(漢唐代)에는 경전(經典)을 수집·정리하고, 그 자구(字句)에 대한 주(注)와 해석을 주로 하는 소위 훈고학(訓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송·명 시대에 이르러 유학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사회체제의 변화에 따라 노불(老佛) 사상을 가미하면서 이론적으로 심화되고 철학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즉, 북송(北宋)의 정호(程顥)는 천리(天理)를 논하였고 그 아우 정이(程?)는 '성즉이(性卽理)'의 학설을 폈으며, 그 밖에 주돈이(周敦), 장재(張載), 소옹(邵雍) 등이 여러 학설을 편 것을 남송(南宋)의 주희(朱熹 : 朱子)가 집성(集成), 정리하여 철학의 체계를 세운 것이 성리학으로, 일명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와는 달리 육상산(陸象山)은 '심즉이(心卽理)'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을 왕양명(王陽明)이 계승하여 육왕학(陸王學)을 정립, 이것 역시 성리학이라 하나 대개의 경우는 성리학이라 하면 주자학을 가리킨다. 성리학은 이(理)·기(氣)의 개념을 구사하면서 우주(宇宙)의 생성(生成)과 구조(構造), 인간 심성(心性)의 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姿勢) 등에 관하여 깊이 사색함으로써 한, 당의 훈고학이 다루지 못하였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내성적(內省的), 실천철학적인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유학사상을 수립하였다. 그 내용은 크게 나누어 태극설(太極說), 이기설(理氣說), 심성론(心性論), 성경론(誠敬論)으로 구별할 수 있다.

【태극설】 태극이라는 말은 성리학 이전에도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나오는데, 그것에 의하면 태극을 만물의 근원, 우주의 본체로 보고 "태극은 양의(兩儀 : 음양)를 낳고, 양의는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은 팔괘(八卦)를 낳고 팔괘에서 만물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 우주관을 계승하고 여기에 오행설(五行說)을 가하여 새로운 우주관을 수립한 것이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이다. '태극도설'은 만물 생성의 과정을 '태극―음양―오행―만물'로 보고 또 태극의 본체를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란 말로 표현하였다. 그 본체는 무성무취(無聲無臭)한 것이므로 이를 무극이라 하는 동시에 우주 만물이 이에 조화(造化)하는 근원이므로 태극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자는 이것을 해석하여 태극 외에 무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 만일 무극을 빼놓고 태극만을 논한다면 태극이 마치 한 물체처럼 되어서 조화의 근원이 될 수 없고, 반대로 태극을 빼놓고 무극만을 논한다면 무극이 공허(空虛)가 되어 역시 조화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같이 무극과 태극은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유(有)가 즉 무(無)이며, 절대적 무는 절대적 유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소옹은 태극이 곧 도(道)라 하였다. 만물의 근원적 이치가 도 또는 도리(道理)라 한다면 태극은 곧 태초부터 영원까지, 극소에서 극대까지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치라 하였으니, 다시 말하면 공간적으로 대, 소가 있을 수 없고, 시간적으로 장(長), 단(短)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자는 천지도 하나의 태극이요 만물 하나하나가 모두 태극이라 하였고, 이 태극에서 음양으로의 이행(移行)은 태극의 동정(動靜)에 의하는 것이며 동정은 곧 음양의 두 기운을 내포하고 있어, 만물의 근원적인 생성(生成)이 전개된다고 하였다.

【이기설】 이기설은 우주, 인간의 성립, 구성을 이(理)와 기(氣)의 두 원칙에서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 이·기라는 말은 성리학이 성립되기 이전에도 있었으니, '역경(易經)'에서는 천지만물을 음양 2기의 활동에서 성립된 것이라 하여 이·기의 개념을 말하였다. 송대에 이르러 주돈이는 그의 '태극도설'에서 모든 근원인 태극이 2기를 낳고, 2기에서 수·화·목·금 ·토 의 5행을 낳고, 5행에서 남·녀가 생겨 거기에서 만물이 화생(化生)하였다고 논하였다. 장재는 우주의 본체를 태허(太虛)라 하였고 그 작용으로서 음양의 2기가 있어 여기에서 천지만물이 만들어졌다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폈으며, 정호도 기의 통일체로서의 건원(乾元)을 내세웠으나 그의 아우 정이는 기의 세계에서 출발하면서도 기와는 별도로 이의 세계를 생각하여 이와 기를 확실히 구별함으로써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단서를 열었다. '역경'에 '일음일양(一陰一陽)을 도(道)라 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정이는 이 도를 '음양의 원인이 되는 것이 도'라고 보았다. 즉, 형이상(形而上)의 도를 형이하의 기에서 구별하여 도를 기의 현상(現象) 속에 존재하는 원리로 하여 새로운 우주관을 세운 것이다. 이 도가 곧 이이다. 그러나 이와 기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어, 그 어느 것이 빠져도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기 양자는 동시존재이며 다만 그 질(質)을 달리할 뿐, 경중(輕重)의 차는 없는 것이나, 기는 항상 변화하는 데 대하여 이는 법칙성을 지니고 부동(不動)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자연히 경중이 부여된다. 특히 그것이 윤리(倫理)에 관련될 경우 이러한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천(天)은 이(理)이다' '마음은 이이다'라고 하는 이면(裏面)에는 이가 법칙적 성격이 부여된 데 대하여 기는 항상 물적(物的)인 것, 그리고 자칫하면 이의 발현(發現)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내재하게 된다. 이것을 일방적으로 말하자면 종래의 성선설(性善說)에 명확한 설명을 붙이는 결과가 되었으니, 즉 '성은 이이다(性卽理)'라는 입장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정이의 이기철학은 주자에게로 계승되어 이·기의 성격은 더욱 확연하게 구별되었다. 주자는 이에 '소이연(所以然 : 존재론적 의미를 가진다)'과 '소당연(所當然 : 법칙론적 의미를 가진다)'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것은 기의 내부에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기가 형질(形質)을 지니고 운동하는 것에 대하여, 이(理)는 형질도 없고 운동도 하지 않고, 그 실재는 기를 통하여 관념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라 하였다. 즉, 기가 형질을 갖고자 할 때, 또는 운동을 일으키려 할 때, 이가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의 이러한 작용은 전혀 불가능하며, 기의 존재 자체도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주자는 이것을 윤리에 적용시켰을 때, 이·기에 경중을 두면서도 기를 악(惡)으로만 단정하지 않고, 기의 청탁(淸濁)에 의한 결과에서 선악을 인정하려 하였다. 인간의 신체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은 기에서 성립되고, 그것이 도덕적으로 선(善)한 성(性)은 이(理)가 마음에 내재화(內在化)된 것으로 보았다. 이 이기설은 그 후 오랫동안 철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윤리적 입장에서 기에 중점을 두느냐, 이에 중점을 두느냐의 차이일 뿐, 우주관 자체는 부동의 것이 되었다.

【심성론】 이기설이 우주를 논한 것이라면 심성론은 인생에 관한 문제를 다룬 것이다. 인간은 우주 내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이기설과 심성론은 상호 관련성을 갖게 된다. 중국 유학에서는 맹자 이후 인간의 성(性)이 선(善)이냐 악(惡)이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분규를 거듭하였고 오랫동안 중국 철학의 큰 문제로 되어 왔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였고, 순자(荀子)는 성악설을 주장하였으나 송대에 이르러 순자의 성악설은 배척되고 성선설은 당시 새로 대두된 성리학자들에 의하여 다시 의리(義理)의 성과 기질의 성으로 나누어져, 전자는 본래 완전한 선이라 하고 후자는 기질의 양부(良否)에 따라 선악으로 갈린다는 성리학설이 정립되었다. 즉, 정이는 이(理)가 인간에 들어와 성(性)이 되고 기는 인간에 들어와 재(才)가 된다고 하였다. 이는 만물의 본체이므로 순선(純善)하고, 따라서 사람의 성은 모두 선하여 악한 것이 없으며, 기에서는 청탁과 정편(正偏)이 있다 하였고, 그 때문에 사람의 재에는 지혜(智慧)와 우둔(愚鈍)이 있고, 현명(賢明)과 불초(不肖)가 있는 것이라 하였다. 정호는 '주역'을 인용하여 형상(形狀)이 없는 것을 도리(道理)라 하고, 형상이 있는 것은 기(器)라 하여 하늘의 도리는 음·양이요, 땅의 도리는 유(柔)·강(剛)이요, 인간의 도리는 인(仁)·의(義)라 하여, 비록 천·지·인의 삼재(三才)가 음양·강유·인의로 다른 것 같으나 도리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이 귀일된다고 하였다. 주자는 인간의 심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본연지성은 이(理)요, 선(善)이라 하였고, 기질지성은 타고난 기질에 따라 청탁과 정편이 있어 반드시 선한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악하게도 된다 하였다. 정(情)은 반드시 악한 것만은 아니지만 때로는 선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즉 기질을 맑게 타고난 사람은 그 정이 선하게 되지만 이것을 탁하게 타고난 사람은 그 정이 악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에 따라 청탁·지우(智愚) 등 여러 차별이 있으나, 이 정은 불변이 아니므로 인간의 노력과 수양에 따라 우(愚)가 지(智)로도 변하고 탁함을 청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니 여기에 인간의 윤리성 및 도덕성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하여 인간이 지켜야 할 규범으로서 성리학자들은 성(誠)·경(敬)을 공통의 진리로 파악하였다.

【성경론】 인간이 자연의 진리와 진정한 자아를 추궁하여 근원적 도리에 도달하는 요체로서 주돈이는 이것을 정(靜)에 두었고, 정호는 성(誠)에 두었으며 정이와 주자는 경(敬)에 두었다. 정이는 '수양에는 경이 필요하며 학문의 발전에는 치지(致知)가 중요하다'고 하였으니, 이들 성리학자들의 정(靜)·성(誠)·경은 필연코 인(仁)과 의(義)로 귀일되는 것이다. 즉, 인·의의 인식 파악은 성·경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함을 말하였다. 성리학은 주자 생존시에는 이것을 위학(僞學)이라 하여 박해를 받았으나 송나라 멸망 후 원대(元代)에 이르러 관학(官學)으로 채택되고 과거(科擧)의 교재로 사용되면서 크게 번성하였다. 청대(淸代)에 이르러 고증학(考證學:實學)이 대두되면서 귀족의 학문이니 실속 없는 공론(空論)이니 하여 배척되었으나 교과 과목으로서의 성리학은 여전히 그 지위가 높았다.

【한국】 한국에 성리학이 들어온 것은 고려 말기, 충렬왕을 호종하여 원(元)나라에 갔던 안향(安珦)이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성균관의 유학자들에게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으로서 새로운 학풍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로서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정도전(鄭道傳) 등을 들 수 있다. 이색, 정몽주, 길재 등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는 데 그쳤고, 또 신왕조에 협력하지도 않았으나 정도전, 하륜(河崙), 권근(權近) 등의 성리학자는 불교의 폐단뿐만 아니라 교리(敎理) 자체를 논리적으로 변척(辨斥)하는 동시에 이태조를 도와 법전(法典)의 제정과 기본정책의 결정을 통하여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는 조선조가 성립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정몽주의 학풍을 이은 길재는 의리학(義理學)의 학통을 세웠고, 그 학통은 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 그리고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면서 기묘사화·을사사화 등의 희생을 겪었으나 도학의 의리정신은 면면히 계승되었다. 그러나 성리학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16세기에 들어서였으며, 송대의 성리학이 이 땅에 전래된 지 300년 가까이 되어서였다. 즉, 이때 한국 유학의 쌍벽인 이퇴계(李退溪)와 이율곡(李栗谷)이 태어났으며, 서화담(徐花潭), 이항(李恒),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그리고 성혼(成渾) 등도 모두 같은 시대의 성리학자들이다. 그들은 성리학을 우리의 것으로 소화함에 있어 자연이나 우주의 문제보다 인간 내면의 성정(性情)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더 추구하였으니, 이퇴계와 기대승 및 이율곡과 성혼의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변(論辨)이 바로 그것이며, 그들은 이 논변을 통하여 '이기성정론(理氣性情論)'을 활발히 전개시켰다. 한편, 내면적 도덕원리인 인성론(人性論)은 송익필(宋翼弼), 김장생(金長生) 등에 의하여 유교의 행동규범인 예설(禮說)로 발전하였다. 이퇴계와 이율곡에 앞선 서화담은 그 이론이 송나라 장재와 같은 기일원론(氣一元論)이라 할 수 있으니, 곧 '태허(太虛)는 맑고 무형(無形)이나 이름하여 선천(先天)이라 한다. 그 크기가 바깥이 없으며, 거슬러 올라가도 시작이 없다'고 하며 기(氣)의 본체를 말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화담은 이러한 기 가운데 '갑자기 뛰고 흘연히 열림이 있으니 이것은 누가 시키는 것인가? 저절로 그렇게 되며 또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곧 이치(理致)가 시간으로 나타남인 것이다'라고 기의 작용을 말하였다. 그리하여 화담은 기라는 것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기만 있을 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퇴계는 이를 절대적인 것으로 본 학자였다. 그는 정통 정주학의 계통을 따라서 항상 이우위설(理優位說)의 입장을 강력하게 견지하였으며, 이의 구극성(究極性)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무릇 옛날이나 오늘날의 학문과 도술(道術)이 다른 까닭은 오직 이 이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극히 허(虛)하지만 지극히 실(實)하고 지극히 없는 것(無) 같지만 지극하게 있는 것(有)이다. …능히 음양·오행·만물·만사(萬事)의 근본이 되는 것이지만 그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찌 기와 섞어서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만유(萬有)를 명령하는 자리요, 어느 것에서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 퇴계는 이와 기를 엄격히 구별하여 그 혼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태극 또는 이로 표현되는 것을 다름 아닌 인간의 선한 본성의 궁극적 근원으로 보았던 것이다. 성리란 곧 인간의 본성을 이루는 것이며, 인간은 그것을 확충하고 발휘함으로써 인간이 인간된 소임을 다하게 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체적·물질적 조건에서 유래하는 것과는 엄격히 구별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퇴계는 당시에 사화(士禍)가 연달아 일어나서 올바른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는 부조리한 사회현실에서 진실로 선악과 정사(正邪)를 밝히고 올바른 진리를 천명함으로써 사람들이 나아갈 바 표준과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퇴계의 이같은 성리학설은 후세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퇴계보다 35년 후에 태어난 이율곡도 퇴계와 마찬가지로 정통 성리학파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성리학만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불교와 노장철학(老莊哲學)을 위시한 제자(諸子)의 학설과 양명학(陽明學) 등 여러 학파의 사상도 깊이 연구하였다. 그러면서도 율곡은 유학의 본령(本領)을 들어 그 기본정신에 투철하였으며, 이를 철학적으로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현실문제에까지 연결시켰던 것이다. 그는 논하기를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녔다 하더라도 공자가 가르친 효제충신(孝悌忠信)이라든지 인의(仁義)와 같은 일상적으로 인간이 행할 도리를 떠나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개별적인 규범(規範 : 所當然)만을 알고 근본원리(所以然)를 알지 못하면 그 행위가 결과적으로 선행(善行)에 합치한다 하더라도 도학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자애(慈愛)와 효도와 충성과 우애라 하더라도 그것을 행하는 이유를 추구하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율곡성리학의 요령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실(경험성)에 근거하여 그 까닭을 추구함(논리성)에 있어 논리적인 모순이나 비약을 배제하고 그 본원성(本源性)을 체계적으로 나타내는 철학사상이라 할 수 있다. 율곡은 진정한 학문이란 내적(內的)으로 반드시 인륜(人倫)에 바탕을 둔 덕성(德性)의 함양과 외적으로 물리(物理)에 밝은 경제의 부강(富强)을 겸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당시의 피폐한 현실을 역사적 갱장기(更張期)로 파악하고 국방력의 강화, 경제적 부강, 사회정의의 확립 등을 주장하는 동시에 이러한 실리를 주장하다 보면 의리(義理)에 어긋나고 의리를 추궁하다 보면 실리를 망각하기 쉬우므로 이러한 모순을 원만히 타결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즉, 권능(權能)과 의리가 상황에 따라서 창의적으로 그 마땅함(宜)과 알맞음(中)을 얻는다면 의(義)와 이(利)는 그 가운데 융화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퇴계, 율곡의 성리학은 인간성의 문제를 매우 높은 철학적 수준에서 구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공허한 관념을 벗어나 역사적, 사회적인 현실과 연관을 가지고 영향을 주었으며, 후세에 실학사상(實學思想)으로 전개되는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12. 성즉리(性卽理)

인간의 본성은 곧 천리(天理)라는 말. 성리학의 근본이 되는 명제. 성즉리와 맥락이 닿는 사상들이 이미 고대로부터 유가의 여러 경전에 나타나 있었지만 성즉리라고 간단 명료하게 밝힌 것은 송대(宋代)의 정이(程?)다. 성리학자들은 이 명제를 인간 본성의 보편성과 순선의 가능 근거로 삼았다.

성리학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이(理)와 기(氣)에 의하여 구성된다. 理는 모든 존재의 원리로서 소이연(所以然) : 그렇게 된 까닭)인 것이며, 氣는 구체적인 존재자로서 소연(所然) 또는실연(實然)을 의미한다. 소이연과 소연, 즉 이와 기는 항상 같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기불상이(理氣不相離)'라고 한다.

그러나 理는 형이상학적 존재요, 氣는 형이하학적 존재로서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이기불상이(理氣不相雜)'이라고도 한다. 즉 이와 기는 개념적으로는 형이상자, 형이하자로 구분되기 때문에 불상잡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만, 현상적 실재물에 있어서는 이를 따라서 기가 있고, 기를 떠나서 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성(性)이라는 것은 바로 사물에 내재해 있는 이를 말한다. '사람의 본성은 곧 천리'라고 하는 이 명제는 인간은 나면서부터 하늘의 이치를 성품으로 부여받았다는 것이요, 이것은 중용에서 말하는 천명지성을 이른다

13. 송학(宋學, 도학)

 중국 송대(宋代)에 일어난 학술·사상의 총칭. 신유학(新儒學), 도학(道學)이라고도 한다. 특히 그 시대에 발전한 형이상학을 가리킬 때가 많다. 11세기 북송(北宋)의 대표적인 학자 주돈이(周敦), 정호(程顥), 정이(程), 장재(張載), 12세기 남송(南宋)의 주희(朱熹) 등의 성(姓)을 따서 주정장주학(周程張朱學), 또는 그 출생지의 이름을 따서 염락관민학(濂洛關學)이라고도 하나, 단적으로 말해서 주희의 주자학(朱子學)으로 대표된다. 송대는 태종(太宗) 이래 문치정책(文治政策)을 국시(國是)로 하여 널리 서민에 문호를 개방한 과거제도를 확립하고, 그 시험에 합격한 진사(進士)에 의한 관료정치, 그 위에 군림하는 군주절대의 독재정치 체제를 택하였다. 따라서 숱한 진사 관료를 배출하였고 고위 관직에 오르는 자도 많았다. 이 등용문인 과거의 시험과목 가운데 경(經)·의(義)가 중시되었는데, 그것이 이미 고정되어 있던 '오경정의(五經正義)'나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의 고주(古注)를 사용하였다. 경(經)과 주(注)에 한정되어 있다 해도 그 문자수가 워낙 방대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암송을 강요하는 이른바 기송(記誦) 학문이 되어,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이어야 할 것이 본래의 목적과 생명을 잃기에 이르렀다. 신유학은 이 과거(科擧) 학문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일어나 경·의의 본의(本義)로 복귀를 지향하면서 차츰 성명(性命)의 학문을 결실시켜 나갔다. 그 일은 주로 '역경(易經)'과 '중용(中庸)'의 해석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이 일에 종사한 것은 사대부 계급 중에서도 하층부에 속한 학자로 '송사도학전(宋史道學傳)'에 이름이 나오는 사람들이었다. 불교와 도교는 북송 역대 국가의 가호하에 성하여, 사상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깊고 넓은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이 2교(敎)로부터 취할 것은 취하고, 유가적(儒家的) 주체성에서 3교(敎)를 종합함으로써 새로운 유교철학, 이기심성(理氣心性)의 형이상학을 완성하였다. 그 목적은 모든 인간이 이(理)를 규명하고 성(性)을 다하여 성인(聖人)이 될 수 있는 실천윤리를 방법론적으로 확립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도(道)의 이념을 확립하는 데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 도, 즉 인륜의 도는 인간의 본성에 근거를 둔 것이며, 본성은 우주의 이법(理法)에 깊이 합치하는 것임을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같은 신유학이야말로 공맹(孔孟) 학문의 정통을 잇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내용은 '중용장구(中庸章句)' '서(序)'에서 말하는 주자의 도통론(道統論)에서 밝혀졌다. 또한 이는 송학을 도학(道學)이라고도 하고, 송사(宋史)에 이르러 비로소 도학전(道學傳)을 두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14.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과학적 학문 태도. 후한서 하간헌덕왕전(河間獻王德傳)의 '수학호고(修學好古) 실사구시(實事求是)'에서 비롯된 말로 청대 초에 고증학을 표방하는 학자들이 공리공론을 일삼는 송, 명대의 학문을 배격하여 내세운 표어이다. 송명의 학은 한당의 유학에 있어서 부족하였던 고도의 철학 이론을 수립하였으나, 고전의 원래 뜻에서 벗어나 주관적 해석에 빠지게 되었다. 고증학자들은 그것을 공담으로 여기고, 고전의 글자와 문구 하나 하나의 정확한 훈고를 하였다. 실사구시라는 말은 그러한 방법론에 가장 적합한 것이다. 이 경우 그것은 공론을 피하고 착실히 증거를 찾는다는 의미인 것이며, 문헌학적인 고증의 정밀함을 존중하는 일이고 전대까지의 주관주의에 대 학문을 하는데 귀납법을 썼으며 과학 정신에 입각하였다. 그들은 먼저 사물을 관찰하여 특별히 주의할 가치가 있는 점을 이끌어냈다. 다음에는 어느 사항에 관심이 생기게 되면 그 사항과 같은 것이나 연관이 있는 것을 나열하여 비교 연구하였다. 마지막으로 비교 연구한 결과를 자기의 의견에 근거하여 다시 여러 각도에서 널리 증거를 구하였으며 증거가 갖추어지면 정설로 삼고 유력한 반증이 발견되면 정설을 포기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로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대진(戴震) 등을 들 수 있으며 그들의 이와 같은 과학적 학문 태도는 공리공론을 떠나 마침내 실학이라는 학파를 낳게 하였다.

15. 심성론(心性論)

인간의 정신적 구조를 심(心),성(性), 정(情)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이론으로서, 이와 관련된 최초의 언급은 맹자에게서 보이나 세계를 이기의 개념으로 분석하고 그것을 기초로 심성을 논하고 성정을 분석하여 논하게 된 것은 송대의 성리학자들에서부터이다.

그 중 주희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입각하여 체계적으로 성리학의 심성론을 완성하였다. 그는 인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고 본연지성은 적연부동(寂然不動)의 미발(未發)의 상태로서 지선순수(至善純粹)하여 우주의 본체에 비할 수 있으며 태극 본연의 묘(妙)로서 만수(萬殊)의 일본(一本)이라 할 수 있고, 기질지성은 기발(已發)의 상태로서 기의 청탁(淸濁), 바름과 편벽됨을 함유하고 성의 선악을 혼효(混淆 : 뒤섞는 것)한다. 이에서 본연지성은 理를 지칭한 것이고 기질지성은 理와 氣를 합해 말한 것이다. 본연지성은 성인과 범인은 물론 사람과 만물의 차별이 없이 동일하나 기의 측면에서 보면 그 바른 것은 사람이 되고, 편벽된 것은 만물이 된다. 사람 중에서도 성인의 기는 청하고 범인의 기는 탁하다. 그러나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두 가지로 독립하여 존재하지 않고 상의상대(相依相對)하여 존재한다. 기질 내의 본연의 성이 함께 있는 전체를 기질지성이라고 말한다. 범인의 기질은 탁하므로 본연의 빛이 전혀 표현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수양을 통해 기질의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

또한 주희는 性, 心, 情 등의 관계에 있어 인의예지는 성이고 측은, 수오, 사양, 시비는 정이며, 인으로 사랑하고, 의로 미워하고, 예로 사양하고, 지로 아는 것은 심이다. 성은 심의 理이고, 정은 성의 용(用)이며, 심은 성정(性情)의 주(主)이다. 이러한 주희의 견해를 요약하는 말이 심통성정(心統性情)이다

16. 심즉리(心卽理)

육왕학(陸王學)에 있어서 심(心)이 곧 일체의 이법이라는 의미의 최고 명제. 심즉리설은 송대의 육구연(陸九淵)에서 발단되었고 명대의 왕수인(王守仁)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왕수인의 심즉리설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의미로 설명될 수 있다. 즉 '심은 理이다.'라는 의미와 '理는 심과 분리되지 아니한다.'라는 의미이다.

왕수인이 심즉리를 제창하게 된 것은 당시의 학풍을 주도하던 주자학, 특히 격물치지설에 대한 회의와 불신에서였다. 심이 곧 理라는 말은 일상 생활 속의 상대적인 사람의 평상심이 곧 理라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적 선악을 초월한 순수 본심으로서의 양지심(良知心)이 곧 理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사욕이 완전히 극복된 순수한 心일 때 그것이 곧 理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왕수인의 심즉리설은 주희가 心에서 분리시켜 낸 형이상학적 가치로서의 도덕리(道德理)를 구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활발한 순수 본심과 일체화시키는 입장이다.

17. 양명학(陽明學)

중국 명나라 중기에 태어난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이 이룩한 신유가철학(新儒家哲學). 송대에 확립된 정주이학(程朱理學)과는 대립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육상산(陸象山)의 철학과 함께 심학(心學)으로도 불린다. 왕양명은 초기에 이학(理學)을 공부하다가 주자(朱子)의 성즉리(性卽理)와 격치지설(格物致知說)에 회의를 느끼고 육상산의 설을 이어 심즉리(心卽理)·치양지(致良知)·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창하고 나왔다. 즉 원리와 원리 실현의 소재(氣)를 엄격히 구별하여, 마음은 기이고 마음이 갖춘 도덕성 등의 이치는 이(理)라고 한 주자의 견해에 대하여, 만물일체와 불교의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입장에서 마음이 곧 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객관세계에 실재하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지식을 이룩하는 이론적 방법으로도 대학의 격물치지를 해석한 주자의 입장에 반대하고, 외재사물(外在事物)을 문제삼으려면 이미 마음이 발동해야 하므로 물(物)을 마음이 발동하여 이룩한 사(事)로 해석하고, 밖에 있는 이치의 파악 이전에 파악하는 주체로서 마음의 선천적인 앎의 능력인 양지(良知)를 이룩하여 사물을 바르게 하는 방법으로 양명은 확정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인식과 실천이 둘이 아니라 하나일 수밖에 없었으며 '전습록(傳習錄)' 권2에 의하면 '앎의 진정한 독실처(篤實處)가 곧 행(行)이요, 행함의 명각정찰처(明覺精察處)가 곧 앎이니, 앎과 행함의 공부는 분리할 수 없다'는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이 제출된 것이다. 양명학은 중국에서는 귀적파(歸寂派)·수정파(修正派)·현성파(現成派)로 삼분(三分)되어 발전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정주학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계곡(谿谷) 장유(張維),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등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어 나카에 도쥬(中江藤樹)가 이를 연구 발전시켰다. 양명학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면 맹자의 선천적인 도덕심과 마음의 발양을 통해 타인을, 나아가 인간세계와 우주를 성실하고 바르게 하자는 이상을 형이상학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가적(禪家的)인 색채 때문에 청대 실학자(實學者)들에 의해 비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연구·계승되는 유가철학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18. 영남학파(嶺南學派)

조선시대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학문상의 한 유파. 주로 이황(李滉)에 의해 제기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등의 성리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학파를 가리킨다. 기호학파를 율곡학파(栗谷學派)라고 하는 데 대하여 영남학파는 퇴계학파(退溪學派)라고도 한다. 조선 전기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영남학파는 당대 사림(士林)을 대표한 학파로서 정계·학계·문단 등 여러 분야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황과 조식은 각각 영남좌도와 우도에서 영남학파의 영수로 추앙되어 많은 문도를 거느리면서 저명한 학자를 배출하였다. 이황과 조식은 서로 경우(敬友)로 대하였고, 그들의 문인들은 대개 두 사람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조식의 문인들은 광해군 때 정계에 다수 진출하여 주도권을 잡았으나, 광해군의 패륜과 폭정을 바로잡지 못한 데다 선현(先賢)을 모독한 정인홍(鄭仁弘)사건으로 물의를 빚었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후 조식학파는 점차 그 학맥이 쇠잔하여지고 퇴계학파는 그 학맥이 성해지면서 좌도·우도의 구별이 사라지고 영남의 학자들이 퇴계학파에 흡수되어 마침내 퇴계학파가 영남학파의 대명사가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목(趙穆), 김성일(金誠一), 유성룡(柳成龍),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 정경세(鄭經世), 허목(許穆), 이현일(李玄逸), 이상정(李象靖), 이진상(李震相), 곽종석(郭鍾錫) 등이 있다. 한편 영남학파에서는 광해군 12년(1620) 이황 문하의 양대고족(兩大高足)의 유성룡과 김성일을 호계서원(虎溪書院)에 추향(追享)함에 있어, 위차(位次)의 선후를 놓고 양현(兩賢)의 자손과 후학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 오랫동안 시비가 분분하였다. 이 사건을 병호시비(屛虎是非) 또는 애학시비(厓鶴是非)라고 한다. 이로 인한 두 계열의 대립은 이후로 해소되지 않고 계속되었는데, 유성룡 계열에서는 병산서원(屛山書院)을 근거지로 하고 김성일 계열에서는 호계서원을 독점하여 서로 대치함으로써, 마침내 병파와 호파로 갈리게 되있다. 병파나 호파 모두 이황의 주리설(主理說)에 귀일하고 있다. 유성룡을 중심으로 한 병파의 학통은 정경세, 유진(柳袗), 유원지(柳元之), 정종로(鄭宗魯) 등으로 이어지고, 김성일을 중심으로 한 호파는 장흥효(張興孝), 이현일, 이재(李栽), 이상정, 유도원(柳道源) 등을 거쳐 이진상, 곽종석에게 이어진다. 한편 이황의 적전으로 조식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던 정구의 학통은 근기지방(近畿地方)으로 전해져 별파(別派)를 형성한다. 정구는 성리학과 예학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역사·지리·의학 등 방대한 저술을 통해 '응용구시(應用救時)'의 측면에 크게 유의함으로써, 후일 허목을 통해 근기학파의 학자들에게 발전적으로 계승되어, 이익, 안정복(安鼎福), 정약용(丁若鏞) 등의 경세치용(經世致用)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정조 21년(1797) 간행된 것으로 오륜의 표본이 되는 인물과 사실을 그림으로 그리고, 한문과 국문으로 그 사실을 설명하고 다시 시로 읊고 끝으로 그것을 찬양하는 찬(贊)을 실은 것이다. 이러한 체제를 갖추게 된 이유는 오륜행실도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모범적인 사례를 먼저 그림으로 그려서 누구나 보면 바로 알 수 있게 하고, 국문으로까지 설명하여 글자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하였으며, 시를 읊어 정감에 호소함으로써 감동의 깊이를 더하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섬세한 편찬 의도를 통해 조선 왕조가 얼마나 오륜과 같은 도덕적 가치의 교육을 중시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20.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 1년) 윤원형(尹元衡)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尹任) 일파 대윤(大尹)을 몰아내어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 김안로(金安老)에 의해 정계에서 쫓겨난 문정왕후(文定王后) 측의 세력인 윤원로(尹元老), 윤원형 형제는 김안로가 실각한 뒤 다시 등용되어 점차 정권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정국은 윤여필(尹汝弼)의 딸인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와 윤지임(尹之任)의 딸인 제2계비 문정왕후의 외척간의 권력투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장경왕후에게 원자(元子) 호(岵)가, 문정왕후에게는 경원대군(慶源大君) 환(緝)이 각각 탄생하자, 김안로의 실각 이후 정계에 복귀하여 득세한 윤원로, 윤원형 형제(小尹)는 경원대군으로 왕위를 계승하고자 하여, 세자의 외척인 윤임 일파(大尹)와의 사이에 대립과 알력을 빚게 되었다. 인종 즉위 뒤 정계는 대윤이 득세하였으나 소윤측은 대윤측에 의해 큰 정치적 박해는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인종의 즉위와 함께 유관(柳灌),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의 명사들이 인종의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고,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에 의해 그 파의 사류(士類)가 많이 등용되어, 기묘사화 이후 은퇴한 사림들이 다시 정권에 참여하였다. 또한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일부 사림들은 소윤인 윤원형 일파에 가담함으로써, 사림들도 대윤·소윤의 양세력으로 갈라졌다. 이 동안 소윤의 공조참판 윤원형이 대윤의 대사헌 송인수(宋麟壽)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계자(階資)를 박탈당하고 윤원로 역시 파직된 사건이 생겨, 문정대비·소윤측의 대윤측에 대한 불만과 함께 문정대비의 인종에 대한 불만으로 발전되었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뒤를 이어 이복 동생인 어린 경원대군이 명종이 되자, 문정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이에 정국의 형세는 역전되어, 조정의 실권은 대윤으로부터 명종의 외척인 소윤으로 넘어갔다. 명종 즉위 직후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으로 재등용된 윤원로는, 윤임 일파의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그들이 경원대군을 해치려 하였다고 무고하였으나, 영의정 윤인경(尹仁鏡)과 좌의정 유관이, 망언을 하고 천친(天親)을 이간한다고 탄핵함으로써 오히려 파직, 해남(海南)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문정대비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소윤측의 뒤이은 음모는 끈질기게 진행되었다. 즉 예조참의로 재등용된 윤원형은 형인 윤원로의 책동이 실패하자, 이들 대윤 일파와 개인적인 감정이 있던 중추부지사 정순붕(鄭順朋), 병조판서 이기(李), 호조판서 임백령(林百齡), 공조판서 허자(許磁) 등을 심복으로 하여,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 : 중종의 8남)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한편 궁궐 밖으로는 인종이 승하할 당시 윤임이 경원대군의 추대를 원치 않아서 계림군(桂林君)  유(瑠 : 성종의 3남)을 옹립하려 하였는데, 유관, 유인숙 등이 이에 동조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로써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은 반역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死賜)되고, 계림군도 음모에 관련되었다는 경기감사 김명윤(金明胤)의 밀고로 주살되었다. 그 외 윤임의 사위인 이덕응(李德應)의 무고로 이휘(李煇), 나숙(羅淑), 나식(羅湜), 정희등(鄭希登), 박광우(朴光佑), 곽순(郭珣), 이중열(李中悅), 이문건(李文健) 등 10여 명이 화를 입어 사형 또는 유배되었으며, 무고한 이덕응도 사형되었다. 을사사화가 끝난 뒤에도 여파는 한동안 계속되어, 1547년 9월 문정대비의 수렴청정과 이기 등의 농권을 비방하는 뜻의 벽서가 발견되어, 봉성군 송인수 등이 사형, 이언적 등 20여 명이 유배당하는 정미사화와, 이듬해 홍문관박사 안명세(安明世)가 을사사화 전후의 시정기(時政記)에 윤임을 찬양하였다 하여 사형되는 등 을사사화 이래 수 년간 윤원형 일파의 음모로 화를 입은 반대파 명사들은 100여 명에 달하였다. 1498년(연산군 4년) 이후 약 50년간 관료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대옥사(大獄事)는 을사사화로서 마지막이 되었으나,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세력에 의해 붕당(朋黨)이 형성되었다.

21.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우주나 인간의 모든 현상을 음양 두 원리의 소장(消長)으로 설명하는 음양설과, 이 영향을 받아 만물의 생성소멸(生成消滅)을 목(木) ·화(火)·토(土)·금(金)·수(水)의 변전(變轉)으로 설명하는 오행설을 함께 묶어 이르는 말. 즉, 음양이란 사물(事物)의 현상을 표현하는 하나의 기호(記號)라고 할 수 있다. 음과 양이라는 두 개의 기호에다 모든 사물을 포괄·귀속시키는 것이다. 이는 하나인 본질(本質)을 양면으로 관찰하여 상대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이원론적(二元論的) 기호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오행은 우주만물을 형성하는 원기(元氣), 곧 목·화·토·금·수를 이르는 말인데, 이는 오행의 상생(相生)·상극(相剋)의 관계를 가지고 사물간의 상호관계 및 그 생성(生成)의 변화를 해석하기 위해 방법론적 수단으로 응용한 것이다. ① 오행상생(五行相生):오행의 운행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낳는 관계이며, 곧 목생화(木生火)·화생토(火生土)·토생금(土生金)·금생수(金生水)·수생목(水生木)이 된다. ② 오행상극(五行相剋):상극에는 억제(抑制)·저지(沮止)의 뜻이 내포되었고, 그 상호관계는 목극토(木剋土)·토극수(土剋水)·수극화(水剋火)·화극금(火剋金)·금극목(金剋木)으로 되었다.

【한방의학과 음양오행학설】 〈한방의학의 철학적 배경〉 음양오행학설은 한방의학의 중요한 기초이론이다. 한방의학의 자연관(自然觀)과 인체의 생리(生理)·병리(病理)에 대한 원리·진단·치료·약물 등에 대한 이론은 모두가 이 음양오행으로 설명된다. 이는 한방의학의 발상지인 중국의 고대 의학자들이 음양오행학설을 응용하였기 때문이다.

〈인체와 음양〉 음양을 인체에 적용시켜 보면 외(外)는 양이고 내(內)는 음이며, 장(臟)은 음에 속하고 부(腑)는 양에 속한다. 인체의 생리기능상 혈압상승, 분비액의 증가 등은 양적(陽的) 현상이며, 혈압강하·분비액의 저하 등은 음적(陰的) 현상이다. 인체에서 이 음양의 조화가 깨어지면 병적인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한방의학은 양과 음의 과다(過多)와 부족을 조화시켜 깨어진 음양의 균형을 되찾도록 해주는 치료학이라 하겠다.

〈인체와 오행〉 한방의학에서는 오행의 생극(生剋)의 이치를 운용하여 인체에 있는 내장(內臟)의 상호자생(相互資生)·상호제약(相互制約)의 관계를 설명하며, 오행의 귀납법(歸納法)으로 인체의 각 부위간(部位間)의 상호연관을 설명한다. 인체는 오장(五臟), 즉 간(肝)·심(心)·비(脾)·폐(肺)·신(腎)과, 육부(六腑) 즉 담(膽)·위(胃)·소장·대장·방광·삼초(三焦),오체(五體) 즉 피모(皮毛)·기육(肌肉)·혈맥·근(筋)·골수(骨髓), 오관(五官) 즉 귀·눈·입·코·혀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인체 외부의 자연환경이란 계절의 변화(春·夏·秋·冬), 오기(五氣:風·暑·寒·濕·燥), 오색(五色:靑·赤·黃·白·黑), 오미(五味 :酸·苦·甘·辛·鹹) 등을 가리킨다. 한방의학에서는 이러한 체내·체외의 복잡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들을 오행의 고유한 특성에 맞추어 분류하고, 그 속성(屬性)이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을 각각 오행에 배속시켰다. 오장을 예로 들면 간(肝)은 목(木)에, 비(脾)는 토(土)에, 심(心)은 화(火)에, 폐(肺)는 금(金)에, 신(腎)은 수(水)에 각각 배속시킨다. 인체를 오행과 결합시키는 데는 오장을 위주로 하고, 이를 통해서 육부·오체·오관·오색 등과 결합시키며, 여기에 일련의 관계가 형성된다. 즉, 일례를 들면 봄철과 간(肝)은 목(木)이므로 이 관계에 의해 담(膽)·목(目)·근(筋)·산(酸)·청(靑)·풍(風)·생(生)과 일련의 발전과정이 성립된다. 이와 같이 오행에 연관지어진 계절의 변이를 통해서 오기의 변화와 발전과정, 그리고 오미·오색 등을 결합시켜 이들 자연현상과 속성을 인체의 오관에 비유하고 있으며, 다시 육부·오체 등을 연결시켜 자연 현상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과 인체 장기(臟器) 간의 생리적인 현상을 계통적으로 해석·관찰한다. 간에 관해서 좀더 설명한다면 간은 담과 표리관계(表裏關係)이며, 심장과 상호자생의 관계에 있다(木(肝)生火(心)의 관계이므로). 한방의학에서는 이렇듯 오행생극(五行生剋)의 제약(制約)과 화생(化生)의 작용을 운용함으로써 장부(臟腑) 사이의 생리적인 상호협조와 제약관계 및 그 평형현상을 설명하며 또 장부의 병리변화(病理變化)를 추정·해석한다. 따라서 오행설은 질병의 한방적 치료 및 진단에 중요한 준거이론(準據理論)이라 할 수 있다.

22. 이기론(理氣論)

 이란 원래 진리를 뜻하기도 하지만 또 원리, 원칙, 이치 등으로 말하여지는 일체의 법칙을 뜻한다. 이는 흔히 소당연자(당연한 것), 소이연(그렇게 되는 까닭)으로 나타내어진다. 그러면서 이 두 가지가 서로 대비되는 경우가 있는데, 대비되는 경우 전자가 대체로 규범 법칙을 가리키고, 후자가 자연법칙의 측면을 가리키는 경향이있다. 그러나 그 구별이 엄격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대비되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소당연의 뜻이 강조될 때에는 이가 선의 원리 및 선 자체의 뜻으로 통용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가 가치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한 것은 이러한 점에서 한 말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는 표준의 뜻을 전제함으로써 사물의 형식 또는 본질의 뜻도 가진다. 이같은 이의 총화,  즉 만물을 이루는 이의 전체가 곧 태극이라는 것이다. 이의 특성은 물론 초경험적(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다. 그런한 점에서 이는 형이상자라 지칭되며, 흔히 도로 대용된다.

 기는 이와 대조, 대비되는 일체의 것을 가리킨다. 기는 현상 사물이 실제로 드러나게 되는 존재의 측면을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사물의 질료(재료)가 기라 하겠다. 이러한 기의 구체적인 실례가 바로 음양이라는 것이다.기는 때때로 기운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가 하면, 오행 또는 질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이는 무작위한 것인데 반하여 기는 유위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현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기이다. 그러므로 기는 감각이 가능한 것이고, 그런 점에서 기는 형이하의 것이라 한다. 가치상으로는 그 자체로 선할 것도 악할 것도 없는 가치중립의 것임은 물론이다.

 이와 같이 이와 기는 사물의 생성,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일 뿐, 그 한가지만으로는 어떤 구체적인 사물일 수 없다. 그러므로 이론상 (분별되어) 서로 떨어질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떨어져 있을 수 없는 관계이다. 실제 사물은 둘이서 함께 하나의 구체적인 사물을 이루며, 어디까지나 함께 있다.

23. 이기이원론 (理氣二元論)

 만물의 존재가 이(理)와 기(氣) 두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는 성리학의 이론. 정이(程)가 주창하였고 주희(朱熹)가 완성하였다. 성리학의 발생시기는 불교의 폐해가 노출되어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야기시켰던 당나라 말기였다. 한유(韓愈)는 오륜(五倫) 등을 강조하는 유교의 사회철학적 입장에서 사회성이 결여된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배척하였으며, 이고(李)는 불교의 장점인 해탈의 논리를 유교의 이론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불교의 필요성을 부정하였다. 이고가 재구성한 유교적 해탈의 논리는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초월적이고 불변적인 요소인 성(性)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성은 자신의 마음 속 깊이 존재하는 주관적인 것이어서 인식하기 어렵다. 이고를 계승한 송나라의 주돈이(周敦)는, 바깥의 사물에 존재하는 불변자와 자신의 성이 일치한다는 전제 하에, 자신의 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바깥 사물에 내재하는 불변자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방법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주돈이는 음양오행으로 구성된 만물의 내면에는 무극(無極)과 태극이라고 하는 불변자가 있음을 확인하였고, 뒤를 이은 장재(張載)는 기(氣)가 잠시 모여서 형성된 형태가 만물의 현상태이고 기가 흩어진 상태인 태허(太虛)가 만물의 본질태라 파악함으로써 만물의 불변적인 본질을 확인하였다. 그 뒤 정이는 만물의 현상태인 음양오행 등을 기로 수렴하고 무극, 태극, 태허 등의 불변하는 만물의 본질을 이(理)로 수렴함으로써 이기론을 완성하였는데 이 이기론은 주희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성리학의 중심적인 이론이 되었다. 정이와 주희에 의하여 완성된 이기론은 원래 인간의 불변적 본질인 성을 인식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개된 것이므로 만물의 변하는 요소인 현상태를 대변하는 기와 불변하는 요소인 본질태를 대변하는 이를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이원론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만물의 물질적 존재와 삶의 작용, 인간의 감정 등 인식가능하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모든 요소는 기이다. 기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본질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인식의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며 궁극적으로 하나로 귀일되는 요소는 이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본질이 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여 이의 입장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 유교철학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다. 한국의 성리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이기이원론을 수용하지만, 퇴계 이황(李滉)을 중심으로 하는 수양철학에서는 존재의 본질을 회복하여야 하는 입장 때문에 이를 중시하였고,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철학에서는 현실을 개혁해야 하는 입장 때문에 존재의 현실적 요소인 기를 강조하였다.

24. 이기일원론 (理氣一元論)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만물의 본질적 존재인 이(理)와 만물의 현상적 존재인 기(氣)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 이기론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와 기의 관계를 '이와 기는 서로 뒤섞이지 않으며(理氣不相雜), 이와 기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理氣不相離)'는 말로 정리한다. 존재의 본질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수양철학에서는 이를 중시해야 하므로 전자의 입장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고, 현실의 개혁에 치중하는 실천철학에서는 기를 중시해야 하므로 후자의 입장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다. 전자에만 치중하면 이기이원론으로 발전하고 후자에만 치중하면 이기일원론으로 발전한다. 이기일원론적 입장에서는 이가 기보다 먼저 존재하며 이가 기를 낳는다고 하는 이기이원론적 주장을 거부한다. 명나라 때의 학자 나흠순(羅欽順)은 이기일원론적 입장을 강화하였고, 청나라 때의 학자 대진(戴震)은 '이는 기의 조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명언함으로써 이의 초월성과 불변성을 부정하였다. 한국의 성리학에서는 이기일원론의 입장이 일부 수용되었다. 서경덕(徐敬德)은 '기 밖에 이가 없으며 이는 기를 주재하는 것'이라 하여 이기일원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이(李珥)는 기본적으로는 이기이원론을 계승하면서도 '이와 기는 혼연하여 사이가 없고 서로 떨어지지 않으므로 다른 물건이라 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이기일원론적 입장에 비중을 두었다.

25. 이통기국설 (理通氣局說)

 이(理)는 하나로 통해 있지만 기(氣)는 국한되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이기론적 학설.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주장한 것이다. 개개 사물의 존재원리인 이는 모두 같고 사물의 형체를 구성하는 기는 각각 다르다고 하는 주희(朱熹)의 이동기이설(理同氣異說)과, 본질은 통하지만 현상은 국한된다고 하는 화엄종(華嚴宗)의 이통사국설(理通事局說)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샘에 괴어 있는 샘물을 기, 샘물의 근원인 지하수를 이로 비유할 때, 이통기국이란 여러 개의 샘에 괸 샘물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그 샘물들의 근원인 지하수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로 이해할 수 이다. 이이는 이와 기의 관계를 그릇과 그 안에 담긴 물질과의 관계로 비유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둥근 그릇이 네모난 그릇이 될 수 없는 것은 기국(氣局)에 해당되고 모든 그릇에 담긴 물이나 공기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은 이통(理通)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26. 인성론 (人性論)

 중국에서의, 사람이 타고난 성(性:품성)을 어떻게 보는가에 관한 논의. 중국 사상사(思想史)에서 사람의 성이 선(善)이냐 악(惡)이냐 하는 것이 자주 논의되었으며, 공자(孔子)는 인간성에 신뢰를 두고는 있으나, 상지(上知)·중인(中人)·하우(下愚)와 같은 표현으로 사람의 소질을 단계적으로 보았다. 전국시대(戰國時代:BC 403∼BC 221)에는 인간 일반의 기준을 발견하려는 경향이 있어,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 등 외에, 고자(告子)는 물이 어느 쪽으로도 흐를 수 있는 것처럼, 수양 방법에 따라서는 선도 될 수 있고 악도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세석(世碩)·밀자천(密子賤) 등은 선악의 양요소(兩要素)가 있다고 하였다. 한대(漢代:BC 202∼AD 220)에는 이것들을 합치거나 음양사상(陰陽思想)을 혼합한 이론을 내세우는 사람이 있었다. 동중서(董重舒)는 성(性)의 선악은 하늘에 음양이 있는 것과 같아서, 교화에 의해 완전한 선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으며, 유향(劉向)은 선악의 구별은 외계의 자극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왕충(王充)은 선을 상인(上人), 악을 하인(下人)과 결부시켰고, 양웅(楊雄)의 선악 혼성(混成)을 중인(中人)과 3단계에 적용하였다. 이와 비슷한 견해로, 순열(荀悅)·문중자(文中子), 당(唐)의 한유(韓愈) 등은 상·중·하의 삼품(三品)이 있다고 하였다. 송대(宋代) 이후에는 이기설(理氣說)에 의해 그 때까지의 설(說)이 통합되었다. 장재(張載)·정이(程) 등의 뒤를 이어 주자학(朱子學)을 창시한 주희(朱熹)는, 사람에게는 우주의 본체인 이(理)에서 생긴 본연의 성과 기(氣)에서 생긴 기질의 성이라는 두 요소가 있고, 선악의 구별은 후자가 좋으냐 나쁘냐에 따라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27. 주자가례(朱子家禮)

 주자가 유가(儒家)의 예법의장(禮法儀章)에 관하여 상술한 책. '문공가례(文公家禮)'라고도 한다. 5권. 부록 1권. 그러나 이것은 후인(後人)의 의탁(依托)이라는 설도 있다. 한국에 전해진 '주자가례'는 명(明)나라 성화(成化)연간에 구준(丘濬)이 위의 '주자가례'를 기초로 하여 여기에 의절고증(儀節考證)·잡록(雜錄)을 추가하여 '문공가례의절(文公家禮儀節)' 8권으로 만든 것이 고려 말기 주자학과 함께 전래되었다. 관(冠)·혼(婚)·상(喪)·제(祭) 사례(四禮)에 관한 예제(禮制)로서의 이 '주자가례'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주자학이 국가 정교(政敎)의 기본강령으로 확립되면서 그 준행(遵行)이 강요되어 처음에는 왕가와 조정 중신에서부터 사대부(士大夫)의 집안으로, 다시 일반서민에까지 보편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송대(宋代)에 이루어진 이 가례가 한국의 현실과 맞지 않아 많은 예송(禮訟)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주자학과 함께 조선이 세계문물에 뒤지는 낙후성(落後性)을 조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면 예학(禮學)과 예학파의 대두는 예와 효(孝)를 숭상하는 한국의 가족제도를 발달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28. 지행합일(知行合一)

중국 명대(明代) 중기의 유학자 왕양명(王陽明)이 제창한 지식과 행위에 관한 근본 명제.

주자(朱子)나 육상산(陸象山) 등이 주장한 '선지후행(先知後行)'설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그 후 왕양명의 중심적 주장으로 간주되었다. 이 명제는 흔히 지식(知)과 행위(行)가 분열되어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알면 반드시 행하고 지행을 합일시켜야 한다는 당위(當爲)를 뜻하는 실천강조의 명제로 해석하기 쉽다.

그러나 본래의 뜻은 그의 '심즉리(心卽理)'설의 논리를 지식과 행위라는 도덕의 영역으로 연역(演繹)한 것으로서 단순한 실천강조론이라기보다는 깊은 철학적 논리인 것이다. '심즉리'설에서는 이(理) 또는 양지(良知)는 처음부터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외계(外界)로부터 지식의 획득은 필요치 않고, 행위는 양지를 실현시키는 존재로만 보는 것이다. 즉 우선 규범(知)을 알지 못하는 행위의 타당성은 보증할 수 없다는 '선지후행'설에는 반대이며, 규범은 이미 마음 속에 내재하고 있으므로 행위는 그 표현에 지나지 않고 양자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인 것이다.

왕양명은 이와 같은 지(知)를 또한 '진지(眞知)'라고도 불렀으며 지(知)가 '진지'가 되지 못하고 지행(知行)이 분열되는 것은 '사욕(私慾)'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하여, 현실적으로 지행합일의 필요조건으로서 '사욕'의 배제를 들었다. 이 때 지행합일의 문제는 당연히 풀리는 것이다

29. 퇴계학(退溪學)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성리학설(性理學說)과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체계. '퇴계의 성리학설'인 퇴계학은 당시의 조선사회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주자학(朱子學)의 이론체계를 가지고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퇴계학은 그 출발점이 주자학과 다르다. 주자는 미발(未發) 이발(已發)하는 마음의 작용과 동정(動靜)하는 자연계의 운동을 포괄하는, 전 존재의 궁극적 근거를 탐색하여 그것을 이(理)라고 규정하였다. 즉, 주자학은 인간과 자연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확립하는 작업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태극론(太極論)·성론(性論)이 중심과제로 등장하는 것은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반면, 퇴계학은 사단칠정(四端七情)이라는 마음의 작용에 대한 탐구에서부터 출발한다. 주자가 심성론(心性論)에 있어 성(性)을 보다 중요한 문제로 삼았다면 퇴계는 정(情)을 주제로 삼은 것이다. '사단은 이의 발이요, 칠정은 기의 발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이라는 퇴계의 제일(第一) 해석과, 기대승(奇大升)의 비판을 받아 수정한 제이(第二) 해석인 '사단은 이가 발함에 기(氣)가 따르는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이다(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라는 주장은 정을 사단과 칠정으로 대립시키고 이와 기를 분리시키며 형이상자인 이에 능동성을 부여하는 데에서 오는 논리적인 모순 등, 문제점을 내포한다. 그러나 퇴계가 정지운(鄭之雲)의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는 주장을 '분별이 너무 심하다'라고 비판하면서도 사단과 칠정을 이와 기에 배속시킨 것은 절대적 가치와 상대적 가치를 구분하고 그 위계를 분명히 하며 사단의 순수선성(純粹善性)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이(理)와 기(氣)가 상호 의존적으로 공재(共在)하고 있으나 형이상학적·가치론적 관점에서 볼 때에 서로 섞일 수 없는 독자성을 갖는다는 이간법(離看法)에 기초한다. 그리고 논리적인 무리를 감수하면서까지 이발설(理發說)을 주장한 것은 이의 절대가치가 현실에서 정으로 발현됨을 논증하여 그 실천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퇴계에 의하면 사단이라는 마음의 작용, 그리고 '소리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자연현상 하나하나가 모두 이의 자기현현(自己顯現)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주체적으로 이 이를 사회에 구현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퇴계의 이와 같은 학설은 사화(士禍)라는 사회적 병리현상의 최종적 원인을 인간의 마음에서 찾아 그 해결방안을 모색한 것으로, 당시 훈척정치(勳戚政治)의 부도덕성에 대한 비판의 심화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는 극히 존엄하여 상대가 없다. 만물에게 명령을 내리고 어떠한 사물로부터도 명령을 받지 않는다.'라는 이존의식(理尊意識)을 기저로 한 것으로, 여기에서 진리를 외경하는 경사상(敬思想)이 발단한다. 퇴계의 학설이 이동설(理動說)·이도설(理到說)로 전개되면서 체용론(體用論)이 도입되어 이론적인 미비점이 보강되기도 하지만 이존의식을 기저로 한 이의 능동성에 대한 퇴계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이와 같은 퇴계의 이는 상대적으로 이의 능동성을 부정하는 경향이 보다 짙은 주자의 이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퇴계학파의 형성·발전과 영향〉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의하면 퇴계는 삼백여명의 문하생을 배출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 가운데 학문적 계보를 형성한 학자는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이다. 퇴계의 학문과 사상은 이들과 그 제자들이 계승 발전시켜 퇴계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남인(南人)이라는 정파를 이루어 율곡학파(栗谷學派)의 서인(西人)과 상호견제하면서 붕당정국(朋黨政局)을 이끌어 나갔으나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정계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영남(嶺南)으로 밀려난 영남퇴계학파, 근기지방(近畿地方)에서 세력을 결집한 기호(畿湖) 퇴계학파로 나누어진다. 이현일(李玄逸)과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결집된 영남퇴계학파는 사단과 칠정,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이와 기를 엄밀히 구분하는 이간법을 토대로 이의 주재성과 능동성을 부각시켜 퇴계의 기본 입장을 보다 강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에 윤휴(尹)와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기호퇴계학파는 기존의 성리학적 범위를 벗어나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경전을 해석하고 이익에 이르러 이른바 실학적 학문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익의 문도들은 천주학을 부정적으로 보는 안정복(安鼎福) 계열과 천주학을 긍정적으로 보는 권철신(權哲身)·정약용(丁若鏞) 계열로 나뉘어 학통이 전승된다. 이 가운데 정약용은 기존의 학맥에 연암파(燕巖派)의 북학(北學)사상을 접목하여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따라서 다산학(茶山學)은 종합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경학(經學)사상의 중추를 이루는 천(天)·상제관(上帝觀)에는 이를 지극히 존엄한 절대자로 외경하는 퇴계의 이존의식이 각인된 것으로 보인다. 퇴계의 문집은 일본에 전해져 에도(江戶)시대에 일본 각판으로 복간되어 일본유학사상의 주류인 기몬(崎門)학파와 구마모토(熊本)학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양계초(梁啓超) 등 근대학자들에 의하여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로 평가되었다. 오늘날에도 퇴계학은 퇴계학연구원·국제퇴계학회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연구되어 국제사회에 한국사상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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