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료 실 기타자료
 

1. 월촌 조목에게 쓴 편지

2. 남명 조식에게 쓴 편지

3. 아들 준의 상소문

4. 월촌 조목의 사직소

5. 율곡의 청이현종사계

6. 휴정(서산대사)의 시

7. 경재잠

8. 숙흥야매잠

9. 이황의 선비론

10. 이황의 서원론

11. 이황의 향약론

12. 사액을 청하는 글

13. 심통원에게 보내는 편지

14. 이만수의 어제제문

15. 어머니의 묘갈문

16. 숙부의 묘갈문

17. 도산기

 18. 공부하는 태도

 

 

1. 월촌 조목에게 쓴 편지

 조카 교 등이 도산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자 하면서 문원과 덕홍 등으로 더불어 되는데로 초가를 짓겠다고 하기에 말리지 않았더니 지금 들으니 양동에 회람의 글을 돌려 그 일에 참여한 사람이 무려 20명이 된다고 하는군. 만일 이화같이 번잡스럽게 떠 벌리게 되면 전일에 그만 두게 하려고 했던 바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물며 그 가운데는 본래 뜻이 없으면서도 억지로 그 이름을 넣게 된 사람마저 한 둘이 아니라 하니 이것은 옳지 못한 일 가운데서도 더욱 큰 일이라 하겠네. 뿐만 아니라 내가 조용하게 지내고자 한 것은 본래 한가로운  마음을 기르고 병든 마음을 수양하려는 것이었지 어찌 어린 아리들을 모아 학과를 권유하고 책을 읽게 하는 훈장 노릇을 하려고 한 것이겠는가? 이미 바라던 바와 일치되지 아니한 일이라 허물을 꾸짖는 말들이 사방에서 들려올 것이네. 그렇게 되면 누가 능히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지금 그 계획은 부득이 금지시키지 않을 수 없네. 그리고 교 등은 이미 영주로 가서 그 사실을 그대에게 알렸을 것이네. 반드시 그리고 하루 속히 이 뜻을 문원에게 알려주시오. 그대가 만일 순흥에 가게 되면 반드시 영주를 지나갈테니 교를 만나고 자세히 일러 그 일을 그만두게 해 주시오.

제자 월촌 조목에게 도산서당 건립을 중지하라는 내용의 편지

 

2. 남명 조식에게 쓴 편지

 나는 어릴 때부터 한갖 옛 성현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을 뿐, 집은 가난하고 모친이 노쇠하였으며 친구들이 억지로 벼슬할 것을 권하였으므로, 과거에 합격하여 이록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 때에는 실로 식견이 없어서 이에 마음이 움직여서 티끌 속에 묻히어 날마다 겨를이 없었으니, 다른 것은 말하여 무엇하겠습니까? 그 뒤에 병이 더욱 심하고, 또 스스로 생각하길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사업이 없을 것이기에 이제야 비로소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서 옛 성현의 글을 많이 읽고는 크게 깨달아, 이후에라도 길을 고치고 방향을 달리하여 상유(桑楡 : 만년에 공부를 성취한다는 뜻)의 경을 거두려 하며, 휴가를 얻어 벼슬자리를 떠나서 옛 서적을 안고 고향의 산중으로 돌아가 아직 채 이르지 못한 것을 구하고자 합니다. 혹시라도 하늘의 도움을 얻어서, 만에 하나라도 한치씩 쌓아올려서 얻는 것이 있다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게 될 것이니 이것이 나의 10년 이래의 뜻이요 소원입니다만, 성은이 잘못 내리고 헛된 이름이 사람을 속이게 되었습니다. 계묘년으로부터 임자년에 이르는 동안 세 번 물러났으나 세 번 불려 돌아왔는데 정력은 늙고 병든 데다가 공부도 전심하지 못하였거늘 이러고서도 무엇이 이루어질까를 바란다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영남의 큰 선비인 두 분은 한번도 만난 적은 없으나 편지는 주고받았다.

 

3. 아들 준의 상소문

 신의 부(父) 판중추부사 이모는 지난 해 11월에 갑자기 담열이 나서 12월초 8일에 병으로 기어이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성은이 망극하게도 친히 슬퍼하여 애도하시고, 듣건대 특별히 후전을 내리시며 관가의 물품으로 장사하라시니, 신은 감격하여 흐느껴 통곡하며 오장이 끊어지는 듯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선신의 간절한 유언을 전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이에 감히 눈물을 흘리며 우러러 성총[임금의 귀]을 흐리게 하고자 합니다. 생각컨대, 선신은 품기가 췌약하고 평소에 병이 있어서 맡은 직책에 종사하지 못하기를 여러 해나 되었습니다. 따라서 네 임금을 섬겼으나 실지로 봉직한 것은 많지 못하였습니다. 근년에 들어와서 더욱 총은을 받아서 마침내 지위가 숭반[숭품의 반열]에 들었으나 혈성으로 그 자리를 피하기를 바랬지만 윤허를 받지 못하고 언제나 허명(虛名), 랍등(蠟登)[실지와 다르게 평가되어 차례를 건너 뛰어 승진함]하는 것을 더욱 안타깝게 생각하였습니다. 돌아가시기 닷새 전에 신에게 정녕하게 말씀하기를, [내가 죽은뒤 만얀 예조에서 순례대로 예장을 청하거든 소를 올려 고사하라]고 하였는데 이는 실로 선신의 평생 동안 충정어린 소원입니다. 신은 더욱 간절하게 울부짖어 통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내리신 전교를 특별히 거두시면 선신은 평소의 뜻을 이룰 수 있고 미신은 선친의 유언을 받들 수 있을 것이며 천지[임금과 신하]가 넓게 이룩하시려는 뜻이 함께 진선 진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면 선신의 천양[구천지하]의 혼도 마땅히 감읍할 것이오니 신은 조심스럽고 두려움을 무릅쓰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바라나이다.

이황의 유언에 따라 국가유공자에 대한 장례인 예장을 거두어 달라는 첫번 째 상소문

 

4. 월천 조목의 사직소

 신의 스승 이모는 일생동안 학문 공부에 노력하였으며 늙어서는 더욱 힘써 염락(주렴계와 정자 형제의 학문)이래의 유학의 바른 학통을 깊이 터득하였습니다. 그의 시문과 논변은 모두 인심을 맑게 하고 세도를 부양시켰으니 전대의 성인을 계승하여 후대를 계몽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돌아가신 후 아직까지 그의 문집이 세상에 전하고 있지 못하니 신이 안타까워 하고 있었으나 근래 향중의 여러 사람이 그 문집을 교정, 필사하게 되니 신의 벼슬을 갈아 주신다면 (이때 월천은 공조참판으로 있었다.) 죽기 전에 이 일을 마칠 수 있겠습니다. 언행록의 원주에는 그가 돌아가신 뒤에 글이 많이 흩어져 그 손자 안도가 수집하였으나 마무리하기 전에 또 일찍 죽었습니다. 본가에서는 이것을 주관 할 사람이 없고, 그 글이 없어져서 세상에 전하지 못할까 합니다. 신이 벼슬자리를 물러나서 죽기 전에 이 일을 마쳤으면 합니다.

스승 이황의 문집을 편찬하기 위해서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는 상소

 

5. 율곡 이이의 청이현종사계(請二賢從祀啓)

 교화의 방법은 사표가 될 만한 사람을 택하여 위임하는 일입니다. 이제 교화를 밝히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선현을 존경하도록 권장하여 후학들로 하여금 모범이 되게 하여야 하는데도 주상께서는 언제나 '중대한 일이니 쉽게 결정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근래의 어진 이를 모두 문묘에 배향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조광조 같은 이는 도학을 밝혔고 이황은 이학에 깊은 이치를 드러내었으니 이  두 분이야말로 종사할 만한 분이고 많은 선비들에게 향학심을 불러 일으킬만 합니다. 우리나라는 개국이래 유학자 가운데 문묘에 종사할 만한 분이 없지 않건만 아직 빠뜨리고 있으니 어찌 성전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조문정공은 도학을 창명하여 후학을 계유하였고, 이문순공은 의리를 침잠하여 한 시대의 모범이 되었으니 이 두 분을 문묘 종사에 표출한다고 하여 그 누구가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조광조와 이황을 문묘에 배향하라는 글

 

6. 휴정(서산대사)의 시

 복희씨는 역상을 밝혀 삼재의 주인이 되고
 공자는 강상을 세워 만고의 스승이 되었도다.
 퇴계는 충서와 명성을 이미 통하였으니
 해동 천지에 하나의 대장부로다.

 伏羲理數三才主 ( 복희이수삼재주 )
 孔子綱常萬古師 (공자강상만고사 )
 忠恕明誠公已達 (충서명성공이달 )
 海東天地一男兒 ( 해동천지일남아 )

서산대사가 이황의 문집을 읽고 쓴 시

 

7. 경재잠(敬齋箴)

1.의관을 바르게 하고, 눈매를 존엄하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가지고 있기를 마치 상제를 대하듯 하라.
 2.발가짐은  반드시 무겁게 할 것이며, 손가짐은 반드시 공손하게 하여야 하니, 땅은 가려서 밟아, 개미집 두덩까지도 (밟지 말고)돌아서 가라.
 3.문을 나설 때는 손님을 뵙듯 해야 하며, 일을 할 때는 제사를 지내듯 조심조심하여, 혹시라도 안이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4.입다물기를 병마개 막듯이 하고, 잡념 막기를 성곽과 같이 하여, 성실하고 진실하여 조금도 경솔함이 없도록 하라.
 5.동쪽을 가지고 서쪽으로 가지 말고, 북쪽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지 말며, 일을 당하여서는 그 일에만 마음을 두어, 그 마음씀이 다른 데로 가지 않도록 하라.
 6.두 가지, 세 가지 일로 마음을 두 갈래 세 갈래 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오직 마음이 하나가 되도록 하여, 만 가지 변화를 살피도록 하라.
 7.이러한 것을 그치지 않고 일삼아 하는 것을 곧 "경을 유지함", 즉 지경이라 하니, 동(動)할 때나 정(靜)할 때나 어그러짐이 없고, 겉과 속이 서로 바로잡아 주도록 하라.
 8.잠시라도 틈이 벌어지면 사욕이 만 가지나 일어나 불꽃도 없이 뜨거워지고 얼음 없이 차가워지느니라.
 9.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하늘과 땅이 자리를 바꾸고 삼강(三綱)이 멸하여지고 구법 또한 못 쓰게 될 것이다.
 10.아! 아이들이여! 깊이 마음에 새겨두고 공경할지어다. 먹을 갈아 경계하는 글을 씀으로써 감히 영대(마음, 정신)에 고하노라.

(이황의 성학십도 제9도에 나오는 글인데, 본래 주자가 친구 " 장경부의 주일잠을 읽고 그 남은 뜻을 주워 모아 경재잠을 지어, 서재의 벽에 써 붙이고 스스로 경계한다."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금화의 왕노재가 경재잠의 지두[입장,영역의 뜻]를 배열하여 도를 만들었다.)

 

8.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1.닭이 울어 잠을 깨면 이러저러한 생각이 점차로 일어나게 된다. 어찌 그 동안에 조용히 마음을 정돈하지 않겠는가! 혹은 과거의 허물을 반성하기도 하고, 혹은 새로 깨달은 것을 생각해 내어 차례로 조리를 세우며 분명하게 이해하여 두자.
2.근본이 세워졌으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의관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안색을 가다듬은 다음 이 마음 이끌기를 마치 솟아오르는 해와 같이 밝게 한다. 엄숙히 정제하고 마음의 상태를 허명정일(虛明靜一)하게 가질 것이다.
3.이때 책을 펼쳐 성현들을 대하게 되면,공자께서 자리에 계시고 안자와 증자가 앞뒤에 계실 것이다. 성현의 마음을 친절히 경청하고, 제자들의 문변(問辨)을 반복하여 참고하고 바로 잡아라.
4.일이 생겨 곧 응하게 되면 실천으로 시험하여 보라. 천명은 밝고 밝은 것, 항상 여기에 눈을 두어야 한다. 일에 응하고 난 다음에는 나는 곧 예전의 나대로 되어야 한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정신을 모으며 잡념을 버려야 할 것이다.
5.동과 정이 순환하는 중에도 마음만은 이것을 볼 것이다. 고요할 때는 보존하고 움직일 때는 살펴야 하지만, 마음이 두 갈래 세 갈래로 갈려서는 안된다. 독서하고 남은 틈에는 틈틈이 쉬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성정을 길러야 한다.
6.날이 저물고 사람이 권태로워지면 흐린 기운이 엄습하기 쉬우니 장중히 가다듬어 밝은 정신을 떨쳐야 한다. 밤이 늦어지면 잠자리에 들되 손을 가지런히 하고 발을 모으라. 잡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심신이 돌아와 쉬게 하라.
7.(그 심신을)야기(夜氣)로써 길러 나가라. 이미 정(貞)이면 원(元)에 돌아오느니라.
8.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여기에 마음을 두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쓰라.

(남당 진무경이 지어 스스로 경계한 것으로 이황의 성학십도 제10도에 나오는 글이다. 퇴계가 노재의 경재잠도를 본떠 이 도를 만들어 경재잠도와 상대가 되게 하였다.)

  

9. 퇴계 이황의 선비론

 퇴계는 유교 이념을 통치 원리로 하는 조선 사회에서 선비가 공동체의 핵심이 되어 유교적 가치를 실현하는 사회적 역할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선비가 예법과 의리의  근본이요, 원기가 깃든 자리이다."라고 하여 선비가 사회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원천이라고 보았다.
 퇴계는 선비가 예법과 의리로 지조를 지킴으로써 어떤 세력과 지위에도 굽히지 않는 기개를 지닌 인격체라고 하였다. 선비의 지조와 세속적 권세를 대조시켜서, "저들이 부유함으로 한다면 나는 인(仁)으로 하며, 저들이 벼슬로 한다면 나는 의(義)로써 한다."고 하였다. 즉 선비는 부귀의 세속적 가치에 맞서서 인의의 유교이념을 정립시키는 주체라고 보았다. 여기서 부귀의 세속적 가치는 인간의 욕망이 지향하는 인욕(人欲)의 대상이라면, 선비가 지향하는 인의(仁義)의 가치는 인간의 성품에 내재된 천리로 인식할 수 있고, 그것은 퇴계가 유교적 수양론의 기본원리로서 확인하고 있는 '인욕을 억제하고 천리를 보존한다.'(謁人欲存天理)라는 명제로 집약될 수 있다.
 또한 퇴계는 유교사회에서 선비가 존중받아야 하고  스스로 당당하여야 하는 모습을 제시하여, "선비는 필부로서 천자와 벗하여도 분수에 넘치는 것이 아니며, 왕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이로서 빈곤한 선비에게 몸을 굽히더라도 욕되지 않는다. 이것은 선비가 귀하게 여겨지고 공경받을 만하기 때문이요, 절의의 명칭이 성립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10. 퇴계 이황의 서원론

 퇴계는 선비를 기르는 임무는 국가와 왕의 임무라고 강조하면서, 선비들도 스스로 자신의 학문과 덕을 닦아 사림공동체를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국가가 성균관과 사학 및 향교를 세워 선비를 양성하고 있지만 과거 시험 공부에 구속되어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지방에서 선비의 공동체로서 사림들이 스스로 서원을 세워 선비를 양성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그 자신이 서원건립운동에 앞장섰으며, 또한 이 서원에 대해 국가가 지원하여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퇴계는 서원의 근본 성격을 규정하여, "선현을 존숭하고 선비를 배양하고 즐겁게 인재를 기르는 자리"라 정의하고 있으며, 서원을 세운 까닭을 한마디로 "도학을 밝히기 위함"이라고 말하였다.
 퇴계 자신도 서원건립운동의 선두에 서서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최초로 사액을 받게 하였으며, 이산서원(영천)의 원규 12조를 제정하고, 영봉서원(성주), 연경서원(대구), 역동서원(예안)의 기문을 지었으며, 역동서원은 터를 잡고 건축하는 데까지 직접 관여하였다. 그 밖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여러 서원을 포함해 9개 서원에 관해 '서원십영'을 지어 풍광과 학풍을 읊기도  하였다.

서원십영 : 죽계서원(풍기),  임고서원(영천), 문헌서원(해주), 영봉서원(성주), 구산서원(강릉), 남계서원(함양), 이산서원(영주), 서구정사(경주), 화암서원(대구) 등 9개의 서원과 총론제원을 합쳐 10수를 수록함

 

11. 퇴계 이황의 향약론

 퇴계는 56세 때 예안향약 곧 향약입조 28조를 정하여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는 법규로 삼고자 하였다. 향약의 기원은 송나라의 여씨향약으로 덕업상권(德業相權)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의 4강령과 이에 따른 세목이 있는데, 주자가 이를 수정하고 보완한 증손여씨향약이 조선시대 향약의 기준이 되었다. 퇴계는 향약입조의 서문에서 향약의 시원으로 고대에
향대부의 직분이 덕행과 도덕 학예로 인도하는데 따르지 않으면 형벌로 규찰하였던 사실을 들고, 당시 조선사회의 유향소가 바로 향대부의 역할을 하였음을 지적하였다.  28조의 향조는 모두 과실을 규제하는 벌칙만 들고 있는데, 이것은  덕행을 권장하는 것은 국가가 학교를 세워 가르치는 것이므로 실질적인 시행에 가장 중요한 벌칙규정만 둔 것이라 설명하였다.
 그는 향약 28조를 향사당에 보내어 벽에 걸어 두게 하였으나, 사람들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 시행하지 못하고 회수하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었던 것은 28조의 향조와는 별도로 향인들의 집회에 좌석의 순서를 정하는 향좌문제로, 이에 대해 극심한 의견대립이 일어났다. 당시 향촌은 여러 신분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퇴계는 벼슬이나 신분 지위를 고려하지 않고 연령 순으로 자리를 정해야 한다는 견해를 내세웠다. 그것은 맹자가 "향당에서는 나이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 것이나, 주자의 '증손여씨향약'에서 "모든 집회에 참석자가 모두 향인일 경우에는 연령 순으로 앉힌다."고 언급하였던 바 이것이 옛 제도의 원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지어 그의 제자들 조차도 퇴계의 뜻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당시의 신분의식은  강하였고 결국 시행되지 못하였다.

 

12. 사액을 청하는 글

 은거하며 뜻을 구하는 선비와 도를 강론하며 학업을 익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세상에서 시끄럽게 다투는 것을 싫어하여, 전적을 짊어지고 넓고 한적한 들판이나 고요한 물가에 나아가 선왕의 도를 노래하고 고요히 천하의 의리를 살피면서 그 덕을 쌓고 인을 익혀 이것으로 즐거움을 삼고자 하였기 때문에 즐겨 서원에 나아가는 것이다. 국학이나 향교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성곽 가운데 있어서 한편으로는 학교에 관한 법령에 구애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일(과거)에 마음이 옮겨 가고 빼앗기는 것과 비교해볼 때, 그 효과를 어찌 같이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말한다면 단지 선비가 학문을 함에 서원에서 힘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어진 이를 얻는 데에도 또한 서원이 국학이나 향교보다 나을 것이다.(....)
 서적을 내려주시고 편액을 내려주시며 전토와 노비를 하사하시어 그 재력을 넉넉하게 하시고, 또 감사와 군수로 하여금 다만 그 진흥 배양의 방법과 돕기 위해 나누어 준 비품을 관할 검찰하는 일만을 강구토록 할 뿐, 가혹한 법령과 번거로운 조목으로 구속을 못하도록 청하고자 합니다.

백운동 서원의 사액을 청하는퇴계의 글

 

13. 심통원에게 보낸 편지

 죽계의 물이 소백산 아래에서 발원하여 옛 순흥부의 가운데를 지나는데 실은 우리 유학계의 선현인 문성공 안향이 살던 곳입니다. 마을은 그윽하고 깊어 구름이 드리운 골짜기가 아득한데 주세붕은 고을을 다스림에 학문을 일으키고 인재를 기르는 것을 제일로 삼아 이미 향교에 정성을 기울이던 터에, 죽계는 선현의 유적이 있는 곳이라 그 땅에 나가 터를 잡고 서원을 지으니 무릇 30여 칸이 되었습니다. ...... 대개 우리 나라 교육은 중국의 제도를 좇아 서울에 성균관과 사학이 있고, 지방에는 향교가 있으나 다만 서원이 없는 것이 큰 흠이었는데 주 군수가 주위의 비웃음과 비방을 무릅쓰고 비로소 여기에 서원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교육기관이란 반드시 국가의 인정을 거쳐야만 그것이 오래 유지될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마치 근원이 없는 물과 같아서 아침에 가득했다가도 저녁에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주군수와 안감사가 아무리 설비를 잘해놓았다고 하더라도 이는 한 군수와 방백이 한 일이라, 임금의 명령을 받고 국사에 오르지 못하면 오래 유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께서는 위에 아뢰어 송나라 고사대로 서적과 편액, 그리고 토지와 노비를 내리게 해주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서원은 한 고을 한 도를 위하는 것이라기보다 한 나라의 교육을 위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또한 최충, 우탁, 정몽주, 길재 등 선현의 옛터에 모두 서원이 서게 되면 나라의 교학이 밝아져 중국의 공자와 맹자의 학문이나 송대의 훌륭한 성리학자들의 학문에 견줄 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즈음 보건대 지반 향교들은 그 가르침이 무너져 선비들이 향교에서 공부하기를 부끄러이 여길 만큼 한심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서원의 가르침을 일으키면 학문과 정치의 결함을 보충하여 선비들이 풍습이 훨씬 달라질 것이며 습속이 아름다워져 임금의 훌륭한 다스림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경상감사 심통원에게 보낸 편지로 백운동 서원의 내력과 규모뿐만 아니라 서원관도 실려있다.

 

14. 이만수의 어제 제문

우리나라의 으뜸가는 기운이

大東元氣 대동원기

참 선비를 낳으셨네

養得眞儒 양득진유

천인성명의 원리는

天人性命 천인성명

공·맹·정·주로 이어지고

孔孟程朱 공맹정주

그 법도 바로잡으시고

執厥繩尺 집궐승척

우리의 길 바로 잡아주셨네

正我步趨 정아보추

크고 넓은 성품이여

渾渾姿性  혼혼자성

끊임없는 공부로다

進進工夫  진진공부

도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음은

道不墜地  도불추지

오로지 선생이 계셨기 때문이로다.

實在先生  실재선생

목릉(선조의 시호)의 옆자리에서

穆陵側席  목릉측석

밝은 슬기를 열어주셨도다.

洞開邇英  동개이영

전원에서는 '백비'(임금의 조서)요

丘園帛비  구원백비

'하전'(임금이 계신 곳)에서는 경연이로다.

廈氈經橫  하전경횡

'각건'(은자의 두건)쓰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角巾南歸  각건남귀

'개석'(절의를 지킴)의 정절이로다.

介石之貞  개석지정

아!도산이여

維陶有山  유도유산

길이 '형비'(은자의 집)를 맹세했네.

永矢衡泌  영시형비

입으로는 구기자와 국화를 먹고

口餐杞菊  구찬기국

손으로는 '첨질'(첨은 서산대, 질은 책)을 펼치도다.

手彼籤帙哉  수피첨질재

깊은 조예와 자세한 분석은

深造豪縷     심조호루

사백 칠십만 백성들이

四七萬人  사칠만인

태산처럼 우러르니

山仰一方  산앙일방

샘물(교훈)은 '청금'(유생을 가리킴)에 이르고

泉達靑衿  천달청금

바른 도의는공녀(길쌈 짜는 이)에 까지 이르렀네.

稻矩紅女  도구홍녀

어진 사람은 사양할 줄 알고

知讓仁人  지양인인

이를 태화롭게 퍼지게 하였네

利得太和  이득태화

사설이 날뛰니

음향縱有  음향종유

어리석은 이단이 들어왔도다.

異端載看以광  이단재간이광

영남 71고을 둘러봐도 미혹되지 않았으니

環嶠七十一不迷  환교칠십일불미

이곳을 추로(공·맹의 고향)라 부른다.

是謂鄒魯  시위추로

이 누구의 공이런가

반誰之功  반수지공   

손길 닿는데마다 신장지킴은

觸類伸長  촉류신장

고풍(뛰어나게 높은 절개)을 잡아당긴 듯 하였도다.

如把高風  여파고풍

수풀과 골짜기에 막대를 잡고 거닐며

凡杖林壑  범장림학

회사(인격을 닦음)하는 가운데

繪素之中  회소지중

육조소와 성학십도를 그렸네.

六條十圖  육조십도

 

 

청컨대 스승이신 우리님과 배식(향사에 종향함)하는 고참판 조목은 함께 흠향하소서.

請師我公與配食故參判趙穆共饗之
청사아공여배식고참판조목공향지

 

 

(정조 16년 1792년 3월 3일에 영남 지방이 사학(기독교)에 물들지 않은  것은 퇴계 이황의 덕이라 생각하여 제문을 지으라는 전교를 내리고 도산서원에서 특별 과거시험을 열었다. 이때 응시한 사람이 7228인이고 수권한 것이 3632장이었다.)

 

15. 어머니의 묘갈문

 선군이 병으로 돌아가셨을 때 오직 백형((伯兄 : 맏형) 잠만이 겨우 결혼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어린 것들로서 슬하에 가득찼다. 부인께서는 아이들이 많은 데다가 일찍이 과부가 된 것을 뼈아프게 느끼시고, 장차 가문을 유지하지 못할 것 같아서 여러 아이들을 성혼시켜 주는 일 때문에 몹시 걱정하셨다. 선군((先君 : 돌아가신 퇴계의 부친)의 삼년상을 필한 뒤에 제사 받드는 일은 맏아들에게 맡기고, 부인은 그 곁에 집을 따로 짓고 살면서 농사짓기,누에치기에 더욱 힘쓰셨다. 갑자년 을축년 같은 해에는 나라에서 세금 징수가 몹시 혹독하고 다급하여 가계가 파산되고 가문이 어려워지거나 몰락하는 사람이 많았는데도, 부인께서는 능히 먼 앞을 내다보면서 눈앞의 난관을 처리해 나갔기 때문에 구업을 잃지 않고 지켰으며, 여러 아들이 점차 자라남에 이르러서는 또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자금을 변통하여 먼데나 혹은 가까운 데 가서 몸가짐과 행실을 삼갈 것을 중요하게 부탁하셨다. 당해 오는 사물을 비유로 든다든가 어떤 일을 붙잡아서 교훈을 삼는다든가 하시는 일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친절하고 절실하게 경각심을 높여주지 않음이 없었다. 늘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과부의 자식은 교육이 없다고 조소하는데, 너희들이 글공부를 백 배로 힘쓰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조소거리를 면할 수 있겠느냐? "고 하셨다. 뒤에 두 아들이 대과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어도 부인께서는 그 영진으로써 기쁘다 아니하시고 항상 세상의 시끄러움을 걱정하셨다. 비록 문자는 익히지 않았어도 평소 선군의 정훈과 여러 아들들의 서로 강습하는 말들을 자주 들어 왕왕 깨닫는 바 있었으며, 그 의리에 들어맞고 사리에 통하는 식견과 사려는 사군자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부인께서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항상 마음 속에 함축하여 두시면서 오직 조용히 겸양하는 태도를 지킬 뿐이었다.

어머니 선비증정부인박씨 부인이 돌아가셨을 때 퇴계가 쓴 글

 

16. 숙부의 묘갈문

  그는 신골이 청수하고 운치가 고원하며, 기상이 화락하고 단아하며 효와 의에 돈독하였다. 대부인을 섬기되 승순(承順)과 이유(怡愉)를 다하여 즐겁게 하고 많은 고아된 어린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길러 가르쳤으며, 사물을 접함에 화로써 하여 비록 창졸지간이라도 언성을 높이거나 노한 기색을 나타내는 일이 없었다. 평소 거처하는 곳에는 좌우에 항상 도서 사적이 가득 차 있어 그것을 즐기기를 맛난 음식 같이 하고, 비록 질병이 지리한 때라도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없었다. 그의 문장은 맑고 풍부하고 전아(典雅)하며 더욱 시에 능하여, 언제나 명승(名勝)을 만나면 반드시 술을 따르게 하고 시를 읊어서 유유히 자적하면서 형해(形骸)를 잊어 버린다.

숙부 송재공 우가 돌아가신 후 퇴계가 쓴  글

 

17. 도산기

 정사로부터 신유에 이르기까지 5년만에 당사 두 채가 대강 이루어지니 거처할 만하게 되었다. '당'(堂)은 세 칸인데 중간 한 칸은 완락재(玩樂齋)라 부르고 동쪽 한 칸은 암서헌(巖栖軒)이라 부르며, 합해서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고 현판을 붙였다. '사'(舍)는 모두 여덟 칸인데 재(齋)·요(僚 )· 헌(軒)으로 갈라서 시습재·지숙요·관란헌이라 하고, 합해서 농운정사라고 현판을 달았다. 당사의 동쪽 구석에 조그만 못을 파고 연(蓮)을 그 속에 심고 정우당(淨友塘)이라 이름 지었다. 그 동쪽에 몽천(蒙泉)이란 샘이 있는데 샘위의 산기슭을 파서 낮추어 관란헌과 가지런히 하고, 거기에 단을 쌓아 매화·대·소나무·국화를 심고 절우사라고 불렀다. 당 앞에 출입하는 곳을 싸리문으로 가리우고 이를 유정문이라 부르며, 문 밖의 오솔길로 시내를 따라 내려가 천동 어귀에 이르면 양쪽 산기슭이 마주 대하는데, 산문 같은 바위가 있으니 이를 곡구암이라 부른다. 여기서 동으로 몇 걸음 더 나가면 산기슭이 끊기는 곳에 탁영담이 나선다. 그 위에는 거석이 깍아 세운 듯이 여러 층으로 포개 세워져 있어 십여 길이 넘는다. 그 위에 대를 쌓아 만드니 우거진 소나무는 해를 가리며 위의 하늘, 아래의 물 사이로 새가 날고 고기가 뛰놀며 좌우의 푸른 병풍 같은 산들은 물에 비쳐 그림자 흩들거린다. 강산의 경치를 한눈에 다 볼 수 있으니 이름하여 천연대라 하였다. 서쪽 산기슭에도 이와 같이 대를 쌓아 천광운영이라 이름할 작정인데 아마 그 경치도 천연대 못지 않을 것이다.
 반타석은 탁영담 가운데 있다. 그 모양이 반타(盤陀 : 안장) 같다 해서 반타석이라고 부르는데, 배를 매어 놓고 술잔을 서로 전할 만하다. 큰물이 날 때는 두 바위가 다 물속에 잠기었다가 물이 빠지고 물결이 맑아지면 다시 드러난다.
 나는 오랜 병에 시달려 항상 앓고 있으므로 비록 산중에 살아도 마음껏 책을 읽지 못한다. 속이 울적하여 숨을 조절하고 나면 때로 몸이 가뿐하고 정신이 상쾌해지는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우주를 굽어보고 우러러보고 하면 감개가 저절로 생긴다. 그러면 곧 책을 던지고 지팡이를 짚고 나가서 난간에서 연못을 구경하기도 하고 단에 올라 사(社)를 찾기도 하며, 혹은 바위에 앉아 샘물을 희롱하기도 하고 대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기도 하며, 혹은 여울에서 고기를 구경하기도 하고 배에서 갈매기와 친하기도 한다. 마음대로 걸어다니며 시름없이 노닐다가 좋은 경치를 만나면 흥취가 저절로 일어나서 한껏 즐긴다. 집에 돌아오면 고요한 방안에 책만이 벽에 쌓여있는데, 책상을 마주하여 잠자코 앉아 마음을 휘어잡고 이치를 궁구한다. 이따금 얻는 것이 있으면 다시 반기어 흐믓함에 음식도 잊어 버린다. 혹 틀리는 것이 있으면 벗을 찾아 물어보고, 그래도 알지 못하면 분발하여 속으로 생각해 본다. 그러나 억지로 통하려 하지 않고 우선 한 쪽에 밀쳐 두었다가 가끔 다시 끄집어내어 허심탄회하게 생각하며 저절로 깨달아지기를 기다린다.
 오늘도 이러한고 내일도 이러하다. 산새가 즐겨 울고 초목이 우거지고 바람 서리 차가워지고 눈과 달이 싸늘하게 빛을 내니,사시의 경치 서로 다르고 흥취 또한 끝이 없다. 너무 춥거나 너무 덥거나 바람이 너무 불거나 비가 너무 오는 경우가 아니면 어느 때 어느 날 나가지 아니함이 없다. 나가면 이러하고 돌아오면 또 이러하다. 이것이 한가롭게 병을 조섭하는 하염없는 일이다. 비록 옛 사람의 대문 안을 들여다 보지는 못하였지만 스스로 마음 속에 즐거움을 느낌이 얕지 않도다......

5년 간의 공사 끝에 '도산서당'을 짓고 퇴계가 서당의 구조와 경치 등을 묘사한 글

 

 18. 공부하는 태도

  1)내 나이 17,8세 무렵에 향내에는 뛰어난 선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따라 배울 만한 스승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옛글을 읽고서 실심(實心-유학에서 추구하는 심성)을 얻고자 하였고 한결같이 몸가짐을 바로 하고자 하였다. 때로는 한 밤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위좌(危坐-무릎을 꿇고 앉아 정좌함)하여 조존(操存-마음이 흩어지지 않게 함)하기를 여러번 하니 심력을 지나치게 썼으나 오히려 마음에 병이 들어 거의 실성할 지경이 되었다. 여러 가지 처방으로 다스리기는 하였으나 이같이 한창 나이에 전혀 강독을 못하다가 늘그막에서야 성인의 길이 분명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즈음 겨우 상유(桑楡-해 저물 무렵. 저녁 으스름이 뽕나무나 느릅나무 가지에 걸림. 노경에 비유함)의 경관을 느낄 수 있으나 또한 오로지 한 마음으로 학문에 힘쓰지는 못한다.

2)나는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학문에 들어가는 단서와 연구의 방법을 알지 못하여 헛되이 애만 태웠으나 탐구하고 사색하기를 마지 않았다. 때로는 밤새도록 정좌하여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였는데, 마침내 마음의 병이 들어 공부를 폐한 지 여러 해가 되기도 하였다. 만약 그 때 스승이나 친구를 얻어서 갈팡질팡하던 것을 바로 잡았더라면, 어찌 그다지 심력을 헛되이 썼을 것이며 늙어서 얻음이 없었겠는가?

3)내가 젊었을 때, 학문에 뜻을 두어 낮에는 쉬지 않고 밤에는  자지를 않으면서 공부를 하다가 드디어 고치기 어려운 병을 얻게 된 적이 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자신의 기력을 살피고 마음씀을 정도에 맞게 하여야 한다. 잘 때 마땅히 자고 일어날 때 마땅히 일어나서 때와 곳에 따라 관성(觀省)·체험(體驗)하여 마음을 제멋대로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필 나처럼 하여 병이 나도록 하겠는가? 억지로 하면 오래가지 못한다. 경(敬)의 삶만이 억지로 하는 폐단을 막아줄 것이니 정신의 넉넉함을 가지고 날로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숙흥야매잠>에 이르기를 '독서하는 틈에 때로 놀아서 정신을 진작시키고 마음을 안정케 하라.'하였는데 이것은 본받을 만하다.

4)마음의 병은 이(理)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헛된 것을 무리하게 찾으며 마음을 지니는 방법을 알지 못하여  묘조장( 苗助長-싹을 뽑아올려 성장을 돕는 것, 맹자에 나오는 이야기로 송나라의 어리석은 사람이 자기 논의 모를 빨리 자라게 하고자 싹을 뽑아 올렸다는 고사, 일을 너무 성급하게 억지로 하는 것)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극도로 마음을 써서 이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또 학문을 처음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병통이기도 합니다. 회옹(晦翁-주자의 호 회헌을 높여 부름) 선생 같은 이도 처음에는 이 병통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만약 일찍이 이러한 것을 알고 곧 고친다면 다시 근심될 것이 없지만, 일찍 알아서 속히 고치지 못하면 드디어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는 평생동안 모든 병의 근원이 다 여기에 있었습니다. 지금 마음의 병은 전날과 같지 않으나 다른 병이 이미 심한 것은 늙었기 때문입니다. 공과 같은 청년이야 기력이 왕성하니 진실로 급히 그 병을 초기에 고치고 섭생과 요양을 절도있게 한다면 어찌 끝까지 괴로워할 것이 있겠으며 또 다른 병증이 생기는 일이 있겠습니까?
 그대가 지난날 공부하고 궁리함이 너무 깊고 현묘한 것에 치우쳐서 자신을 지나치게 믿어 무리하게 탐구하는 데서 생긴 병의 뿌리이니 어찌 염려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치료하는 방법은 이미 공께서 터득하였을 것이나, 먼저 세상의 궁함과 통달함, 얻음과 잃음, 영광과 굴욕, 이(利)와 해(害) 등 일체를 생각지 말고 마음에 누를 끼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지니면 앓던 병이 이미 5분 내지 7분까지는 나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모든 일상생활 속에서의 관계를 적게하고 기호와 욕망을 절제해서 마음을 비우고 한가롭고 담담하고 유쾌하게 지내야 합니다. 도서, 화초를 완상하거나 내와 산과 고기와 새를 보는 즐거움이라든지 기분이 좋고 마음에 맞는 것을 항상 대하도록 하여 심기를 편안히 하는 것이 가장 요긴한 치료법입니다.
 책을 볼 때는 마음내키는대로 그 맛을 즐겨야 합니다. 이(理)를 궁구하는 데는 일상생활의 쉽고 분명한 곳에서부터 시작하고, 오직 마음에 집착하는 것도 그렇다고 집착하지 않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을 하면 저절로 얻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너무 집착하거나 마음을 거기에 속박하여 빠른 효과를 얻으려고 해서는 더욱 안됩니다.
 (남시보-이름은 언경 호는 동강, 처음 화담 서경덕에게 사사하고 뒤에 퇴계 문하가 되었음)에게 준 글

5)심기의 병은 범과 같아서 나도 일찍이 이러한 <범>에 물려 여러번 약을 써보았지만 효험을 보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거니와, 그대는 다시 "이런 경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하고 묻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마음의 병통이 생기는 까닭은 공께서도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으로만 이 병통을 제거하려고 하면 더욱 도져서 수고롭고 요란함을 견디지 못하여 마침내 큰 병이 되고 말 것입니다. 공은 이미 학문의 맥락과 단서를 대략 알고 있으니, 이에 다시 허다히 무리한 탐색과 한가로운 안배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른 바 조존성찰(操存省察-흩어지는 마음을 붙잡고 자신을 깊이 반성함)의 공부는 우선 생각하지 말고, 다만 일상생활의 명백한 곳에 관심을 가지면서 마음을 너그럽게 지니고서, 이러한 속에 정신을 노닐 게 하며, 한가롭고 유쾌한 마음을 가진다면 주자가 조식잠(調息箴)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심성이 저절로 길러 질 것입니다. 이리하여 오랜 세월 동안 공부가 쌓이면 마음의 병이 저절로 고쳐질 뿐만 아니라 수렴(收斂-흩어지는 마음을 단속하여 거두어 들임)가 조존의 효과도 여기에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존성찰할 때 집념을 두지 말라는 말은 학문하는 사람의 일반적인 방법이 그러하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마음의 병이 이처럼 한뒤에라야 안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도리는 안 팎의 구분이 없습니다. 무릇 밖을 삼가는 것은 안을 함양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공자 학단에서는 심학을 말하지 않았으나 심학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 나는 지난 날 가르쳐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러한 이치를 몰라 헛되이 마음의 병만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손을 오로지 놓고 지내기를 수 십년 세월이었는데 이것이 통한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공은 마땅히 나를 경계삼아야 할 것입니다.
 (정자중-이름은 유일, 호는 문봉)에게 답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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