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애 》인간상 / 생애의개관 / 업적,배울점 / 연보
 

 1. 관료와 공직자로서의 모습

 퇴계는 32세 때 문과의 초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34세 봄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다.이 때 고향 선배인 농암 이현보는 그의 급제 소식을 듣고, "지금 인망있는 사람 중에 이 사람을 뛰어넘을 사람이 없으니 나라의 복이고 우리 고을의 경사이다."라 하여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후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에 올랐는데, 당시에 권력의 실세인 김안로가 만나고자 하였으나 선비로서의 지조를 지켜 권력자를 찾아가 만나지 않았다. 이에 김안로는 앙심을 품고 그의 승진을 가로막아 첫 출발에서 시련을 맞아야 했다.
 이듬해 호송관으로 왜인을 동래까지 보내주었으며, 36세 때 성균관 전적을 거쳐 호조좌랑에 올랐다. 39세부터 44세까지 순탄하게 승진하였다. 이 무렵 경연에 나가 가뭄이 심할 때는 임금에게 식사 때 반찬가지수를 줄일 것과 죄인을 사면하는 일을 삼갈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임금의 덕을 닦도록 정성껏 간언하였다.또 왕명을 받아 어사로 나가 충청도 지역을 돌아보고 흉년으로 인한 백성들의 기근을 구제하고 탐관오리를 적발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다시 어사로 강원도 지역의 재해를 시찰하였다.
 44세 때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 등을 지냈으나 이 시기에 병으로 못 나가는 일이 잦았으며, 중종이 승하하자 중국에 부고를 전하고 시호를 청하였는데 두 표문을 지어 중국 예부관원이 표문의 문장과 필법을 칭찬하였다 한다. 그 당시 왜구의 사량진 침입 이후 정부는 대마도와 교류를 단절하였는데, 왜인이 다시 사신을 보내와 교류를 요청하자 그는 왜인의 사신을 물리치지 말고 일본과 강화를 허가하도록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때 그는 대마도주에 보내는 답서와 일본군 장군에게 보내는 답서 등을 지었으며, 외교문제를 원칙과 현실의 조화로서 해결하려는 탁월한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이 무렵 을사사화가 일어나 권력을 잡고 있던 간신 이기의 상소로 한 때 관직이 삭탈되었으나 죄없는 사람을 벌 줄 수 없다는 여론이 일어나 곧 복직되었다.
 48세, 49세 사이의 2년은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로 외직에 나가 있었다.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다스리는 일이 말고 간결하였으며 아전이나 백성들을 모두 편안하게 해주었다. 형이 충청감사로 부임하자 그는 풍기군수로 전임되었다. 이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의 편액과 서적을 청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서원이 융성하게 되었다. 그후 감사에게 세 번 사표를 내었으나 회답이 없자 해임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관직에서 파직 삭탈당하였다.  
 52세 때 다시 조정에 나와 홍문관 교리로 경연시독관을 겸하여 경연에서 임금을 모시고 강의를 하였으며,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사학의 선생과 학생들에게 통문을 돌려 학풍이 퇴락함을 지적하고 예의를 바로잡도록 타일렀는데 무너진 학풍을 회복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당시 명종이 21세가 되자 수렴청정하고 있는 대왕대비에게 임금이 친정하도록 정권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교서를 지어 올렸다. 또한 여러 제문을 지었으며 새로 중수한 경복궁의 전각과 편액을 쓰는 등 당시 국가의 중요문서와 궁중의 기록이나 글씨가 모두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55세 때 병으로 거듭 사퇴를 청하여 허락받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58세 때 임금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다시 조정에 대사성으로 나갔다. 59세 때 휴가를 받아 귀향한 후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임금의 재촉으로 67세 때 서울에 다시 올라왔다. 며칠 뒤 명종이 승하하여 명종의 행장을 지었다. 예조판서에 임명되자 거듭 사표를 올려 두 달 만에 다시 병으로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68세 여름 또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이때 임금은 퇴계를 깊이 신임하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의 중책을 겸임시켰지만 병으로 거듭 사퇴를 청하였으며, 임금은 휴가를 내리고 내의원을 보내어 문병하며 음식물을 하사함으로써 세심하게 공경하였다. 이 때 새로 등극한 17세의 선조임금에게 무진육조소를 지어 올렸다. 이것은 정치의 기본원리와 당면과제를 제시한 것이다. 경연에서 임금의 도리를 진언하고, 선조를 위하여 자신의 평생 학문을 응축하여 성인이 되기위한 수양의 원리와 방법을 집약한 성학십도를 올렸으며, 선조는 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항상 음미할 수 있게 하였다.
 69세 때 판중추부사로서 재상들과 문소전의례와 법도를 고증한 일이 조정에서 활동한 마지막 사업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임금은 남길 말을 요구하였고, 이에 그는"태평한 세상을 걱정하고 밝은 임금을 위태로이 여긴다."는 옛말을 인용하여, 나라는 항상 위난에 방비함이 있어야 하고, 임금은 겸허하여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성학십도에 관한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고, 임금의 요청에 따라 이응경과 기대승을 천거하고 돌아갔다.
 69세 때 이조판서, 의정부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사퇴하고 판중추부사로 옮겼다. 귀향한 이후로도 모든 벼슬을 벗고 은퇴하기를 거듭 상소하였으나 끝내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강직한 퇴계는 실제로 부임하지 않는 벼슬을 사양하였고, 퇴계를 아끼고 공경하는 임금은 그의 벼슬을 거둘 수가 없었다.
 70세 겨울 그의 병이 위중하자 임금은 내의를 보내 약을 가지고 가게 하였지만 도착하기 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부고가 조정에 올라가자 임금은 애통해하며 영의정으로 증직을 명하였고, 승지를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드리게 하는 특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퇴계는 34세에 벼슬을 시작하여 70세에 사망할 때까지 140여 직종에 임명되었으나 79번을 사퇴하였다. 30회는 수리되었지만 49회는 뜻에 없는 근무를 하였다. 질병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래 벼슬보다 학문과 교육에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물러나기만 한 것은 아니고 일단 직책을 얻으면 책임을 다하고 소신껏 일을 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행한 일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문무를 겸비한 국방책, 침범한 왜적을 용서하고 수교를 해야 한다는 외교정책인 걸물절왜사소(乞勿絶倭使疏), 왕도를 깨우친 무진육조소, 파면을 당하면서도 궁중의 기강을 바로 세운 진언, 성학십도를 올려 나라의 교학을 개혁한 일, 군수로 나가서는 수리시설을 하여 농업을 진흥시켰고, 단양에서는 팔경을 지정하여 자연을 가꾸었으며, 우리나라 처음으로 산수를 기록하여 치산과 등산하는 법도 등을 남겼다. 충청, 경기, 강원에 어사로 나가서는 탐관오리를 잡아내고, 흉년으로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였다. 중국 사신을 맞아서는 행패를 막았고, 문장과 글씨로 중국 예부 관원들을 감탄시켰다. 궁궐의 기문과 상량문, 현판 글씨, 외교문서 작성 등 많은 글과 글씨를 남겼다.

참고도서 : 1) '퇴계의 삶과 철학' / 금장태 저 / 서울대학교 출판부   2) '이퇴계의 실행유학' / 권오봉 저 / 학지원

2. 학자 및 사상가로서의 모습

1) 뛰어난 재질
  연보에 따르면 어릴 때 논어 등을 그에게 가르쳐준 그의 숙부 송재공 우는 그의 이해력이 뛰어남에 항상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논어를 읽던 중에 퇴계는 이(理)자를 가리키며 그 뜻을 '무릇 일의 옳음'이라고 스스로 깨달아 말하였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의 숙부는 그를 가리켜 "가문을 유지할 사람은 이 아이임에 틀림없다."고 하였다고 한다. 자라서 향시를 비롯한 대과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험에 수석 아니면 차석의 성적을 올린 것만 보더라도 그의 재질이 우수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학(성균관)에서 함께 생활한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 1510~1560)가 그를 가리켜 "영남의 수재"라 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닌 듯하다.

2) 열성적인 학구열
 퇴계는 14세 때부터 "비록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일지라도 반드시 벽을 향하여 조용히 생각할 정도"로 학문을 좋아하였고, 그것이 20세 경에는 "침식을 거의 잊어 가며 독서와 사색"에 잠길 정도여서 마침내 일생 동안 그를 괴롭히던 몸이 야위는 일종의 소화불량증을 일으키게 되었다. 심지어 안질로 오랫동안 고생할 경우에도 독서하기를 쉬지 않았다는 제자의 기록이 있는가 하면, 군수직을 버리고 귀향할 때에도 그의 짐꾸러미는 오직 몇 상자의 책뿐이었다고 한다. 59세 때에도 산림에 들어가 30여년의 연구에 매진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였다. 고봉 기대승과의 편지를 통한 토론은 죽기 얼마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보면 초년에서 말년에 이르도록 그의 학구열은 변함이 없었다. 학구열에 불타는 진지한 학자의 모습, 이것이 퇴계를 논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모습이다.

3) 겸허한 학문 태도
 퇴계의 학문 태도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고봉 기대승과 나누던 "사단 칠정에 관한 논변"이다. 그 당시는 장유유서의 수직적인 인간관계가 지배하던 때였으므로 사대부들은 학문을 하는데도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일방적인 전수만을 강조하던 형편이었다. 따라서 선배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을 가하는 자유로운 토론이 어려운 풍토였다. 이러한 풍토를 깬 것이 사단 칠정 논변이다. 선배의 이론에 반기를 든 고봉도 비범하지만, 그것을 넓은 아량으로 받아들인 퇴계의 태도에 더욱 감탄하게 된다. 8년 동안의 논변이 진행되는 동안에 퇴계는 고봉의 이론을 신중하게 검토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할 때마다 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논변이 시작될 무렵 퇴계는 대사성까지 지낸 59세의 대가였던 데 비하여 고봉은 갓 과거에 급제한 33세의 소장학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장장 8년 동안의 논변이 가능하였고 그것이 드디어 당시의 정체된 학문 풍토에 새바람을 불러 일으켜 우리 나라 성리학의 발전을 가져왔는데 이것은 퇴계의 겸허한 학문태도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를 그의 제자는 "선생은 겸허로써 덕을 삼아 털끝만큼도 교만하여 잘난 체 하는 마음이 없었다."라고 평하였다.

참고도서 : '퇴계 선집' / 윤사순 역주 / 현암사

3. 교육자로서의 모습

1) 교육관
 오늘날의 국립대학총장에 비견되는 성균관 대사성의 책무를 맡으면서 퇴계는 그의 교육관을 밝힌 적이 있다. "선비란 예의의 원천이며 원기의 본거이다......지금부터 제군들은 모든 일상생활이 예의 가운데서 행하여지도록 하라. 서로 채찍질하여 구습을 벗도록 힘쓰고, 집에서 부형 모시는 마음을 미루어 밖에서 어른과 웃사람을 섬기는 예를 삼을 것이다. 안으로 충신(忠信)에 주력하고 밖으로 손제(遜悌)를 행함으로써 국가가 문예를 장려하고 학교를 세워 선비를 기르는 뜻에 부응하라." 요컨대 올바른 선비를 길러 국가의 교육 목적에 부응하는 것이 퇴계가 지향했던 교육자상이었다.

2) 학문의 방법
 학문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 "다만 부지런하고 수고스럽게 하며 독실하게 하는데 있으니, 이렇게  하여 중단됨이 없으면 입지가 날로 강해지고 학업이 날로 넓어질 것이다."라고 타일러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독서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 "그저 익숙하게 읽는 것 뿐이다. 글을 읽는 사람이 비록 글의 뜻은 알았으나 만약 익숙하지 못하면 읽자마자 곧 잊어 버리게 되어 마음에 간직할 수 없을 것은 틀림없다. 이미 읽고 난 뒤에 또 거기에 자세하고 익숙해질 공부를 더한 뒤라야 비로소 마음에 간직할 수 있으며 또 흐믓한 맛도 있을 것이다."라 하여 겉만 핥고 지나치는 것을 경계하며, 익숙하게 하여 깊이 체득하는 공부를 강조하였다.

3) 교육의 방법
 퇴계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맨 먼저 '소학'으로부터 시작하여 '대학', '심경', '논어', '맹자' 및 '주자서'를 가르친 다음 모든 경서를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처음 배움에 나아가는 제자가 읽어야할 고전으로서 특히 '심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소학'은 체와 용을 함께 갖추었고, '근사록'은 의리의 정밀한 것은 비록 상세하나 학자들을 깨우치고 감동시켜 분발하게 하는 것이 부족한 듯하다. 초학자가 처음 시작하는 데는 '심경'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고 하여'소학'을 넘어서 처음 읽을 책으로 '심경'을 제시하고 '근사록'을 한 단계 더  높은 단계의 연구서로 제시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주자전서'를 통해 학문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학문이 심화되면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을 소개하였다. "'주자전서'를 읽을 수 있으면 학문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요, 이미 그 방법을 알 게 되면 반드시 느끼게 되어 떨치고 일어날 것이다. 여기서 공부를 시작하여 오랫동안 익숙한 뒤에 사서를 다시 보면 성현의 말씀이 마디마디 맛이 있어서 비로소 자기에게 쓰이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주의 학문을 한결같이 표준으로 삼아서 지행병진함을 가르쳤다.

4) 다산 정약용이 퇴계의 교육을 평한 글
 "일일이 실행을 통해서 많은 인재를 길렀으며 누구든 어떤 부문이든 가르쳐 모두 대도에 이르게 하였다.중도에 폐하는 사람이 없이 끝까지 가르쳤으며 학문을 닦아 선생의 뒤를 잇게 했다. 퇴계선생의 가르침을 읽으면 손뼉치고 춤추고 싶으며 감격해서 눈물이 나온다. 도가 천지간에 가득차 있으니 선생의 덕은 높고 크기만 하다."

4. 문학자 및 서예가로서의 모습

1) 퇴계는 당시까지 가장 많은 저술을 한 분이다. 전문적 저서는 별도로 하더라도 일기는 손수 쓴 것 4년분 외에 이름이 전하는 것만도 9종이 된다. 시는 제목을 아는 것이 3560수(퇴계의 시는 '도산전서' 중에 실린 것이 2천여편을 넘칠만큼 풍성하여 종전의 학자 문집 중에서 보기 어려웠을 뿐아니라, 전문작가의 시집 중에서도 보기 드믄 존재였다.), 편지는 3천 수 백편이 문집에 전하고, 그밖에 여러 종류의 긴 글이 문집에 298편 실려 있다.
 퇴계학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열심히 연구하고 있지만 퇴계의 저술을 다 읽은 이는 없을 것이다. 워낙 방대하여 읽기도 힘들지만 아직 다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일기와 한글 편지는 거의 행방을 알 수 없고 그의 수학에 관한 글과 '계몽전의'는 어려워서 잘 해득하지 못한다.

2) 퇴계는 早年부터 終年까지 사이에 중국문단의 명시인들의 시의 영향을 받았다. 곧 도연명·두보·한유·유종지·백락천·유우석·구양수·소동파·소옹·주희 등의 시를 읽고, 次韻·用韻·和韻했다는 것은 문집 도처에 보인다.그 중에도 陶·杜·歐·蘇·朱의 시를 가장 사랑하였다. 초년엔 陶·杜詩를 중년엔 蘇詩를 만년엔 朱·邵詩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陶杜朱詩를 즐겨 읽고 인간서정을 승화시켰다. 퇴계의 제자 문봉 정유일은 "선생이 시를 좋아하되 도연명과 두보의 시를 즐겨 보았으나, 만년엔 주자의 시를 더욱 즐겨 읽었다"고 하였다.

3) 퇴계는 문장과 글씨로 중국 예부 관원들을 감탄하게 하였으며, 경복궁의 기문과 상량문, 현판 글씨,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여 명성을 떨쳤다.

참고도서 : '이퇴계의 실행유학' / 권오봉 저 / 학지원

5. 생활인으로서의 모습

1) 합리성의 존중
 성호 이익은 퇴계의 예는 예의 지침이며 상례에 있어서는 가장 합리적인 제일인자라 받들고 정리해서 예설유편을 엮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어느 시대든지 통용될 수 있는 법이라야 예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제도에 얽매이기 보다는 인간 위주여야 하고, 때와 재물과 분수와 처지에 맞아야 하고, 검소하고 원칙에 맞게 시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중국 예법이 여자를 낮추어 죽은 아내를 망실(亡室)이라 한 것을 고실(故室)로 바로 잡았고, 계모를 홀대한 예법을 버리고 아들에게 적모(嫡母-서자가 아버지의 정실을 일컫는 말)상을 치른 후 산소 아래서 시묘도 살게 했다. 죽은 남편을 따라 죽으려는 질부(조카의 아내)를 말려서 열녀가 되기보다는 살아 어버이에게 효도하도록 했고, 상중에 병든 아들과 조카를 종권(일시적으로 상주하는 일을 중지시켜 건강을 회복하는 것)시켜 고기를 먹게 했다. 생일 제사를 지내면 힘에 벅차 기제사도 못 지내게 된다고 당시의 풍속을 바꾸었다. 제물을 많이 담으면 비용이 많이 든다고 쌓지 못하게 하였으며, 부모 합설 제사는 가례에 어긋난다며 단설(제삿날 그 분 제물만 차림)하게 하였다. 초상에는 문상객에게 술 대신 차를 내놓게 하였으며, 제사 음식의 음복은 남과 나누어 먹지 않고 제관만 먹게 하였다. 아무리 죽은 부모가 좋아한 음식이라도 살아있을  때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아들이 따르기 어려우므로 일정한 제물만을 쓰게 하였으며, 진설도에 있더라도 철이 아니면 다 구해 쓰지 못하므로 세 가지 철에 맞는 과일로써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2) 뛰어난 인격자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은 '학봉집'의 '퇴계선생 언행록'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쉽고 명백한 것은 선생의 학문이요, 정대하여 빛나는 것은 선생의 도(道)요, 따스하고 봄 바람 같고 상서로운 구름 같은 것은 선생의 덕(德)이요, 무명이나 명주처럼 질박하고 콩이나 조처럼 담담한 것은 선생의 글이었다. 가슴 속은 맑게 트이어 가을 달과 얼음을 담은 옥병처럼 밝고 결백하며, 기상은 온화하고 순수해서 순수한 금과 아름다운 옥 같았다. 무겁기는 산악과 같고 깊이는 깊은 샘과 같았으니, 바라보면 덕을 이룬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퇴계는 아랫사람이나 제자들에게도 항상 공손한 말씨를 사용하고 예의를 지켰으며,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퇴계가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한 까닭은 사화로 어지럽던 시대적 상황과 학문에 대한 열정도 있었지만 한 고을을 다스릴 만한 벼슬에 머무르라는 어머니의 뜻을 지키고자 한 것이기도 하다.
  퇴계의 일상생활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말과 행동을 진지하고 신중하게 하여 우아하고 경건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한평생  경(敬)을 실천한 그의 모습과 태도는 한결같이 단아하고 차분하여, 수양에 의해 절제된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보여 주었다.

 3) 멋과 풍류를 즐기는 생활
 퇴계는 자연을 지극히 사랑하여 자연 풍경과 철따라 피는 꽃나무에까지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 많은 시를 남겼다. 퇴계가 살던 집에는 항상 솔·대나무·매화·국화 등을 심어 벗삼고 즐겼다.
 50세 때 한서암을 짓고 뜰에다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오이를 심어 지조의 표상으로 삼았다.
 이듬해는 계상서당으로 옮겨서도 방당을 만들고 연을 심고, 솔·대·매화·국화·연(송·죽·매·국·연)을 다섯 벗으로 삼아, 자신을 포함하여 여섯 벗이 한 뜰에 모인 육우원(六友園)을 이루어 어울리는 흥취를 즐겼다.
 61세 봄에는 도산서당 동쪽에 절우사의 단을 쌓고, 솔·대·매화·국화를 심어 즐겼다. 특히 매화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 서울에 두고 온 매화분을 손자 안도편에 부쳐 배에 싣고 왔을 때 이를 기뻐하여 시를 읊기도 하는 등 매화는 그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매화분 하나를 마주하고 주고 받으며 화답하는 시를 읊조리는 모습은 매화와 퇴계가 하나가 되어가는 경지를 느끼게 한다.
 또한 퇴계는 산림에 묻혀 사는 선비로서 산사를 찾아 독서하거나 산을 찾아 노닐기를 즐겨 했다. 그는 독서하는 것과 산에서 노니는 것이 서로 같은 점을 들어 독서와 산놀이를 일치시키기도 했다. 가장 즐겨 찾아 노닐었던 산은 청량산으로 도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그는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그 이름이 경관과 어울리지 않으면 이름을 새로 짓기도 하고, 그 자신 소백산을 돌아보고 유산록(遊山錄)을 지었지만 다른 사람의 유산록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서문이나 발문을 지어 주면서, 산수의 유람이 갖는 의미를 깊이 음미하고 있다.(퇴계는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소백산을 유람하고 봉우리와 대의 이름을 고쳐지었으며, 돌아와 '소백산유산록'을 지었으며, 홍응길의 '금강산유산록'에 서문을 지었고, 남명 조식의'두류산유산록'에 후식을 지었다. 단양군수로 있으면서 단양팔경을 정했으며 죽계구곡도 정했다고 전해진다.
 산놀이뿐만 아니라 물놀이도 그의 운치있는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고향 선배인 농암 이현보을 모시고 분천에 가서 뱃놀이를 하였고, 단양군수로 있으면서 제자 황준량과 함께 귀담에서 뱃놀이하였다. 퇴계가 가장 즐겨 뱃놀이하던 곳은 도산서원 앞에 있는 탁영담이다. 62세 때에는소동파가 적벽에서 뱃놀이를 한 해로부터 8갑주(480년) 되는 날이기에 퇴계도 여러 제자들과 풍월담에서 뱃놀이를 하려고 준비하였으나 전날 큰 비가 내려 이루지 못하여 못내 아쉬워했다.
  47세 무렵에는 7대(臺)와 하동(霞洞)에서부터 청량산까지 낙동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11승경을 명명하고 시를 짓는 풍류를 즐겼다.